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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과 한국교회
설교: 진동은 목사 행6:7
2014년 03월 07일 (금) 21:20:47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우리나라 근대역사 가운데서 3.1절은 기독교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3월이 되면 기독교계에서는 반드시 그 뜻을 되새기고 그 때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 보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한국 기독교를 말하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 할 년대가 있습니다. 첫째 "1885년" 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885년도 4월 5일 부활절 날로 보고 있습니다. 이날 미국에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라가 인천에 상륙함으로서 이 땅에 기독교가 시작 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엄밀하게 따지자면 한해 먼저인 1884년 9월 22일 북미 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파송 받아 잠시 중국에서 활동한 바 있는 알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의사이며 먼저 한국에 들어와 영국과 미국의 공사관 부속의사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선교사역에 기초를 놓을만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때 개화파 자객에 의해서 보수파의 우두머리였던 민영익이 칼에 맞는 사건입니다. 이때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하게 되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알렌은 왕실의 시의관이 됩니다. 이것이 한국선교의 발판이 되어 1885, 4, 5일 한국에 정식으로 선교사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1887년 9월에 새문안 교회를 세우고 11월에는 정동감리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1885년은 귀중한 해입니다. 둘째 "1895년" 입니다. 이 해는 청일전쟁이 끝났고 민비가 살해된 해입니다. 민비의 죽음은 우리민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우리민족의 자존심과 체면을 유린시킨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고종은 우유부단하고 우둔하며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같은 임금 옆에서 자문 역할을 민비가 해냈습니다. 민비는 똑똑하고 조리 있게 말하는 달변가로 상대방의 의중을 꿰뚫어 보는 야무진 여성이었습니다. 그때 고종은 옆에 앉아서 듣고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민비는 연세대학교의 창시자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민비가 언더우드 부인에게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때 부인이 미국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에는 자동차도 많습니다, 쵸코렛도 많습니다, 그리고 땅도 넓고 한나라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있습니다". 듣고 있던 민비가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 고 했습니다. 그 때 부인이 정중하게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 그보다 더 좋은 나라가 있다고", "예, 그곳이 하늘나라입니다, 그곳은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는 그런 나라입니다". 말을 다 듣고 난 민비는 "나도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며 크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0일 후에 죽었습니다. 일본이 한국과 합병을 하려고 하니까 민비가 나서서 조리 있고 똑똑한 말로 반대하며 나섰기 때문에 일본의 공사 미우라가 죽인 것입니다. 1895년 8월 20일 밤 경복궁에서 일본 군인들이 군화를 신은 채 침실로 들어와 민비를 죽인 후에 녹원으로 끌고 나와 이불을 덮어씌우고 기름을 끼얹고 불태웠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이 해는 잊을 수가 없는 해입니다. 그리고 이 해는 기독교가 우리나라의 시련의 역사 속에 동참하였던 해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때부터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되어 가는데 앞장을 서게 됩니다. 민비의 시해로 장로교 감리교가 합동으로 추모 행사를 치르고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도로 연변에 모여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민족으로부터 호응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민비가 시해되던 1895년부터 1905년까지 10년 동안 530여명이던 신자들이 무려 26,057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때 특별하게 교세가 발전된 곳은 평양지방으로 그곳에서도 정주지방 입니다. 그곳은 인구가 2만명 정도였는데 그곳 인구의 대부분이 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곳이 청일전쟁 후 유행병과 악질이 번져서 희생자들이 속출할 때 관공소에서도 손대기를 꺼리는 일에 기독교인들이 희생적으로 봉사함으로서 국민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의 역사에서 1885년과 1895년은 잊을 수가 없는 해인 것입니다. 셋째 "1907년" 입니다. 교회가 단결되어 민족화 되어가고 세력화 되어가면서 커다란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새롭게 대두된 문제가 기독교에 대한 일본의 압박입니다. 선교사들이 이 같은 현상 앞에서 기독교인들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너무 급속히 뭉치지 말고, 정치화하지 말고, 세력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으로 하여금 박해의 구실을 주게 될 뿐이며 기독교가 혹독한 수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충고입니다. 이때는 우리 민족이 최고로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일제의 압력은 더욱 거세어 가고, 그들을 상대해서 이길 힘은 없고, 내일은 막막한 상황이고, 이완용의 내각은 민족의식 말살정책을 펴 나가고 있고, 더구나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음모는 노골화되어 가고 있었으며, 밖으로 나가 호소해 보았지만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극심한 좌절감으로 속수무책인 때였습니다. 이 때 에 일어난 운동이 바로 신앙대부흥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일대 각성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운동의 내용을 보면 1) 영적 각성운동이고 2) 성경 읽기 운동을 벌여 이때 성직자 자원자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고 3) 도덕운동으로 술 안 먹기 운동, 도박 안하기 운동이 일어났고 4) 새벽기도회 운동을 일으켜 열심 있는 영성운동이 일어났으며 5) 사경회를 통하여 신앙부흥 운동이 일어남으로서 길선주, 김익두 같은 대부흥사들이 배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는 박해를 받으면 더 왕성해지는 종교입니다. 조용하면 감소하고 고난당하면 더욱 급속하게 증가되어 가는 것이 기독교의 속성입니다. 마지막으로 "1919년의 3.1운동" 입니다. 영적인 힘과 도덕적인 힘이 축적되어 가면서 마침내 일본의 압박에 분개하여 일어난 것이 1919년 3월 1일의 항일운동 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3.1운동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우리 민족 전체에게 굉장한 용기를 주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지성인들에게 지대한 영향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때 무궁화가 우리나라의 꽃으로 선정되는데 기독교인들이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발로 짓밟아도 또 다시 살아나는 꽃, 그래서 저항의식을 상징하는 꽃으로 무궁화를 국화로 선정했던 것입니다. 당시 황성신문은 사설을 통하여 학생들은 수를 놓을 때 무궁화를 수놓으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또 남궁억 같은 이는 언론인이며 교육자로서 당시에 시를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때 지은 대표적인 시 가운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라는 찬송의 가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하러 가자는 말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무궁화를 심으러 가자는 말이고 항일에 나서자는 뜻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제일먼저 무궁화를 심은 것도 젊은이들에게 저항의식을 길러 주기위한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결과 3.1운동 때 전체 학생 120명 가운데 70% 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감옥에 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 여파로 그 해 졸업식이 연기되었고 얼마 후에 치러진 졸업식에서 남궁억은 치사를 통하여 다시 이 무궁화 정신을 들려주게 됩니다. "나는 강원도 사람입니다, 강원도는 눈이 많이 오면 길이 없어집니다, 그때 나는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하여 커다란 발자국을 남겨 놓고 걸어갔습니다, 당신들은 부디 뒤를 따르는 자들이 되지 말고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것이 3.1운동을 전후하여 일어났던 기독교의 감추어졌던 모습들입니다. 이때가 한국 기독교에 있어서는 가장 눈부시게 발전하였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 중에서도 이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기독교가 시작되었던 1885년이고 둘째는 민비시해로 인하여 교회가 민족화 되었던 1895년이고 셋째는 내적인 신앙성장을 위하여 신앙대부흥운동을 일으켰던 1907년입니다. 넷째는 일본의 탄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저항에 나섰던 3.1운동의 1919년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해 볼 때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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