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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최초 기독교 국가라는 비전 꿈꿨던 건국대통령
2015년 05월 19일 (화) 16:20:40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한국교회가 어렵다. 그리고 사회로부터 수많은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이하 이승만)다.
이승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곧 대한민국의 탄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두고 벌이는 치열한 현재의 공방이 ‘역사 전쟁’으로 불릴 만한 이유다. 더불어 이승만을 폄훼 하는 세력들의 의도는 다분히 요즘 한국 기독교에 대한 안티 그 자체다. 호불호를 떠나서 단순히 기독교가 싫기 때문에 이승만을 매도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동양 최초 기독교 국가’라는 비전을 꿈꿨고 기독교와 자유민주주의의 적인 공산주의를 반대한 그의 정책과 혜안은 반드시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승만이 하나님의 순전한 뜻으로 나라를 건국하려고 했던 것처럼 위정자들도 초심으로 돌아가고 한국교회 역시 처음 받아들이고 회개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가 오지 않을까?

▲감동의 국회 개회사
이승만은 공적인 취임식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과 애국선열과 삼천만 동포’를 언급했다. 특히 1948년 5월 31일 상오 10시 제헌국회 제1차 본 회의록 속기록은 당시 개회현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개회사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사람의 힘만으로 된 것이라고 우리는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와 제청).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시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은 민족과 남북통일, 민족 대표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것, 그리고 역사의 첫 걸음을 걷는 제헌국회 시작의 기쁨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기도했고, 그 내용이 그대로 기록돼 있다.
당연히 제1공화국의 국가의전이 기독교식으로 바뀌어 갔음은 물론이다. 해방 이후 국기에 대한 경례 역시 일제의 잔재인 ‘배례’를 했는데 한국기독교연합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독교식인 ‘묵례’로 바뀌었다. 이승만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결단이었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온갖 우상과 미신으로 찌든 전통과 풍속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당시 하나의 외래종교로 치부되던 기독교가 역사의 중심인 국회의 시작을 열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와 함께 대단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뜻이었고 이후 세계 역사에 없는 교회의 부흥과 경제성장이 뒤따랐다.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한 것이 교회와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적극 드러내야 한다. 초대국회의장 개회사가 우리에게 시사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국교회는 새겨봐야 할 것이다.
▲이승만과 기독교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하나는 우리 민족의 유명한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기독교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김규식, 안창호, 김구, 여운형, 이동휘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모두가 우리 민족의 장래가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이승만도 그러한 인물의 하나였다. 오히려 그는 위의 인물들보다 기독교와 더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90년의 긴 생애를 사는 동안 기독교와의 관계를 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년에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국가차원에서 기독교를 도우려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1895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기독교를 알게 되었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 것은 거의 6년이란 긴 세월(1899~1904)을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다. 죄목은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반역죄였다. 20대의 청년 죄수가 절망 상태에서 마지막 희망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으려 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감옥에 있는 동안 이상재를 비롯한 40명의 동료 죄수를 개종시킴으로써 그의 전도 방법이 외국 선교사들의 관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904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시기에 미국에서 조지 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를 거치며 박사학위를 끝낸 것도 미국교회의 도움이 컸다. 학업을 마친 다음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한국에 돌아와서는 YMCA 청년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미국 망명 기간(1912~1945)에도 이승만은 항상 기독교와 관련을 가지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하와이에 교회와 교회학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도와 줄 미국인 기독교인들을 조직하고 그들을 통해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처럼 기독교적 생활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평생 술, 담배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 매일 아침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와 가정 예배를 보았다.

▲마태복음을 좋아한 대통령
평소 마태복음을 좋아했던 이승만은 늘 프란체스카 여사와 주거니 받거니 식의 기도를 하거나 성경읽기를 했다고 전해지는데 6.25 기간에도 그 기도와 말씀 읽기는 계속 되었다고 한다. 다만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공직자로 행동해야 했기 때문에 기독교에 유리한 정책을 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통치하던 1960년까지 기독교는 정부로부터 적지 않은 혜택을 입었다. 군인들에게 기독교를 알리기 위한 군목제도, 그리고 감옥의 죄수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형목제도가 도입되었다. 그가 임명한 135명의 장관급 고위직 가운데 거의 절반인 47.7%를 기독교인으로 채웠다. 대통령 시절에도 이승만이 한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들려던 젊은 시절의 꿈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노력 때문에 해방 당시만 해도 3만 7천명에 불과했던 기독교인이 그가 물러나던 1960년에는 114만명으로 늘어났다. 그가 기독교 국가라는 비전을 품고 기독교를 배려하려 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때문에 그의 독재에 대한 논쟁은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조세력들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반공정책’을 둘러싸고 늘 일어난다. 그가 반공주의를 강하게 내세우게 된 데는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기독교인과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오래 전에 공산화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이승만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는 너무나 무관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재평가 되어야 하는데도 폄하하고 있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100년 전의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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