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N. H. Allen)은 1859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881년 오하이오 주 웨슬리언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1883년 마이애미 의대를 졸업하였다. 그가 장로교 외국선교부 중국 선교의사로 임명되어 상해에 도착한 것은 1883년 1월 11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해를 넘기고도 중국 땅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상해와 남경 일대를 헤매고 다니기만 했다. 상해에는 이미 알렌의 동료의사들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상태였고, 다른 의사들도 개업을 서두르는 형편이라 알렌이 선뜻 개업할 형편이 아니었다.

입국을 이렇게 저렇게 앞뒤를 재어보면서 8개월 가까이 방황하고 있던 그에게 상해의 몇몇 유력인사들은 코리아로 갈 것을 권했다. “미개척지인 코리아의 문을 두드려 보시오. 조선 주재 외교관과 외국인 고관에게 추천해 줄 테니 조선땅을 두드려 보십시오. 그곳에는 병원이 없소. 병원이라는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를 만큼 깜깜한 나라이니까 닥터 알렌이 들어가기만 하면 우선 그곳 주재 외교관들이 환영할 것이고 외국인 고관들이 들어가 있으니 그들도 더없이 환영해 줄 것이오. 결심이 서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추천해 드리겠소.” 그러나 알렌은 선뜻 결심을 하지 못했다. 마침 조선 세관에서 일하고 있던 요셉 하스(Joseph Hass)를 알고 있던 터라 그에게 편지를 띄웠다. “코리아에 들어가 있는 외국 거류민들이 어느 만큼 의사를 필요로 하는지 알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요셉 하스의 답장은 조선 사람도 조선 사람이려니와 코리아에 들어가 있는 외국인들에게 병원은 한시가 급하다는 내용이었다. 알렌은 요셉 하스의 답장을 받고 뉴욕에 있는 선교 본부에 편지를 띄웠다. 1884년 6월 8일의 일이었다. “나의 코리아 입국 계획의 승인 여부를 전보로 알려 주십시오. 만일 본부에서 나의 계획을 수락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선교부와의 관계를 끊고 개인 자격으로라도 코리아에 입국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아십시오.” 선교 본부에서는 알렌의 단호한 결심을 받아들였다. 7월 22일, 선교 본부는 선교부의 사업으로 코리아에 입국해도 좋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알렌은 주한 미국 공사관에도 연락을 취했다. 미국 공사관에서 알렌에게 준 회보에는 단단한 단서가 붙어 있었다. “조선에 머무는 동안 어떤 경우에라도 선교사라는 것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런 조건으로라도 코리아에 오고 싶다면 입국하십시오.” 알렌은 우선 입국해 놓고 보아야 한다는 판단 아래 그러한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렌은 1884년 9월 14일 상해에서 배를 타고 떠나 9월 20일 제물포에 닿았고, 이틀 후에는 서울에 들어와서 미국 공사관과 그 외 서양공관의 공의로 임명되었으나, 자신의 신분이 선교사임을 감히 밝히지 못했다.

하늘의 뜻으로 그런데 얼마 후에 알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1884년 12월 4일에 발생한 우정국 사건으로 개혁파인 김옥균, 박영호,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이 주도한 갑신정변 덕택에 알렌의 위치가 유리해진 것이다. 갑신정변은 신흥국가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하루 빨리 받아들여 고루한 종래의 제도를 개혁하자는 젊은 지식인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정변이다. 우정국 낙성식을 기하여 정부 요인들을 제거하기로 계획한 각본대로 사대세력 보수계의 중추인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맞았다. 12월 4일 한국 최초의 체신기관인 우정국이 전동(현대의 안국동)에 신설되어 개국 연회가 열리던 날의 일이었다. 내외 고관을 초청한 연회는 7시에 시작하여 점차 무르익으면서 8시를 넘겼고, 다시 30분 이상 지났을 때 갑자기 “불이야!” 외치는 소리가 연회장 쪽으로 들려왔다. 불길은 우정국 가까운 민가에서 치솟고 있었다. 연회장의 사람들이 놀라서 피신하려던 참에 맨먼저 밖으로 달려나갔던 민영익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며 들어와 쓰러졌다. 쓰러진 민영익에게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은 묄렌도르프였다. 그는 민영익을 일으켰다. 민영익의 뒷덜미에서 솟구치는 피는 묄렌도르프의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우정국 총판 홍영식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는 본래 인품이 어질고 덕망이 있고 매사에 신중하였다. 소요 중에 민영익이 처참한 상처를 입고 묄렌도르프가 그를 부축하여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것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남몰래 부하 병사 몇몇을 시켜 민영익 일행을 호위하도록 했다. “목참판께서 금위대장을 모셨으니 너희들은 두 분이 안전한 자리에 이르실 때까지 호위해 드려라!” 이렇게 하여 묄렌도르프는 민영익을 부축해 자기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닥터 알렌을! 알렌을 모셔 오너라!”“한방 의사들도 불러라! 모두 불러 대령케 하라!” 황급한 발걸음이 알렌의 집에 이르러 세차게 대문을 두드렸다. “쾅쾅, 쾅쾅쾅, 쾅쾅쾅...” “누구시오?” “목참판댁에서 왔습니다.”“무슨 일이시오?” “알렌 선생님을 빨리 모시고 오라는 분부입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오니 지체 마시고 서둘러 오라십니다.”“지금 안 계시오.” 알렌을 모시러 갔던 사람들은 실망하여 주저앉았다. 알렌이 아내와 함께 집에 돌아온 시각은 밤 10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알렌을 에워싸자 서울에 들어온 지 8일밖에 안 된 부인 메신저는 무슨 큰 변이 난 것이 아닌가 하여 불안해 하였다.“알렌 선생님, 피를 많이 흘린 환자가 있으니 치료 준비를 하시랍니다. 목참판께서 일각이 여삼추처럼 기다리고 계십니다.” “환자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다쳤다더냐?” “쇤네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저 피를 많이 흘려서 위급해진 어르신네가 계시다고만 전하라 하셨습니다.” 알렌이 묄렌도르프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민영익은 심한 출혈 끝에 빈사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의 생명을 노린 자객의 칼은 뒷통수 쪽에서 목 밑까지 두 치 깊이로 한 자 가량이나 찢어놓았다. 민영익은 동맥이 끊기고 목 뒷쪽과 몸에 일곱 군데나 자상을 입었다. 한 생명의 불빛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이 민영익을 에워싸고 전전긍긍하며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우왕좌왕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막강한 권력으로 정치계에 영향을 미치던 왕비의 친정조카 민영익, 22세에 외교사절이 되어 청나라에 파견되었고, 이어서 1883년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대한 답례로 23세에 전권대사가 되어, 미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인도, 싱가폴, 홍콩을 둘러보고 돌아온 야망에 찬 고관 민영익, 그가 칼을 맞아 중상을 입고 무력하게 쓰러져 있었다. 민영익은 비참한 모습으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알렌의 탁월한 의술과 정성어린 치료로 민영익이 회생하였다. 민비는 경기감사 심상훈으로부터 우정국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이럴 수가... 영익이가 칼에 맞아 사경에까지 가다니... 누가 내 친정 사람들과 대신들을 그런 식으로... 금위대장의 병상을 누가 지키고 있더냐?” 민비는 불편하고 착잡한 심기를 누르며 심상훈에게 물었다. “미국 공사관 공의 알렌 의사가 떠나지 않고 있사옵니다. 알렌 의사의 의술이 아니었다면 소생이 불가능했다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도우심인 줄로 아옵니다.” “알렌이 우리 영익이를 살려냈다니, 그런 고마운 일이 있나.” 서울 장안에는 또 한 가지 신기한 소문이 뜨겁게 번져갔다. “서양 의원이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더라.”“민영익 대감이 칼을 맞고 죽었는데, 서양 의원이 감쪽같이 살려냈다는구먼.” “조화는 조화지, 피가 콸콸 쏟아지는 살점도 그 사람 손이 닿으면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문다니, 무슨 조화 속일까...” 정동에 있는 알렌의 집으로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집 한 칸에 마련한 진료실은 비좁아 터질 것만 같았다. 민영익은 알렌의 정성어린 치료로 3개월만에 완전히 쾌유되었고 다시 조정의 일을 보기 시작했다. 소란했던 갑신년의 해가 기울고 을유년 중순을 넘어선 어느날 민영익이 몸소 정동 알렌의 집을 찾았다. “아니, 민 대감께서?” “안녕하셨소, 알렌 박사?” “아직 몸도 불편하실 텐데 이렇게...” “아니오, 이제는 이렇게 멀쩡하게 다 나았어요.” 민영익은 따라온 시종에게 가져온 상자의 뚜껑을 열라고 명령했다. “아니, 이건 돈이 아닙니까?” “그렇소이다. 우리 조선돈 십만 냥입니다. 이건 알렌 의사께 드리는 내 보은의 표입니다. 생활에 보태 써주십시오.” “대감, 저는 의사로서의 직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대감의 생명을 지켜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오. 이것은 내 작은 성의이니 받아 주십시오.” 민영익은 굳이 그 돈을 놓고 돌아갔다. 십만 냥이면 엄청난 거금이었다. 알렌은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 거금을 무엇에 쓴다는 말인가? 이윽고 알렌은 무릎을 쳤다. 병원을 세우자, 병원을! 1월 22일, 그는 미국 대리공사 풀크(Foolk)를 찾아가 자신의 뜻을 말했다. 풀크는 외무독판 조병호에게 알렌 의사의 계획을 전했고, 묄렌도르프와 민영익이 숙의한 끝에 국왕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광혜원 설립
2월 초 고종은 쾌히 윤허를 내렸다. “귀하의 신청서를 받아 보았습니다. 서울에 병원을 세우겠다는 귀하의 편지에 대한 우리 의정부(議政府)의 회한(回翰)은 이러합니다. 병원을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로 느끼는 터이며 병원이 설립되어 잘만 운영된다면 일반 백성들과 우리 자손들에게 유익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큰 뜻을 품은 알렌 의사에게 우리는 고맙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마침 큰 집 한 채가 비어 있으니 고치면 병원으로 쓸 만한 줄 알며 고치는 일과 설비 문제는 알렌 의사에게 알리겠고 상의도 할 것입니다. 督辦交涉通商事務 金允植(印)”

병원 설립 윤허뿐만 아니라 병원 건물이 됨직한 가옥까지 희사했다. 갑신정변때 개화당의 일원이었고 우정국총판이었던 홍영식의 집이었다. 홍영식은 상감이 궁궐을 떠나 청군진영으로 파천할 때에 호위를 하다가 청나라 군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1883년 미국으로 가는 전권대사 민영익을 따라 함께 갔던 사람, 개화된 미국의 문물과 서양의 뒤를 따라가는 일본을 보고 우리나라도 이제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홍영식. 가문도 더할 나위 없고, 인물도 출중하던 사람, 덕망이 있어서 인심을 잃을 일도 없고 매사에 신중하던 사람이 나라 위하는 방법을 시류 따라 붙잡지 못했다 해서 역적이 되어 가산을 몰수 당했던 것이다.

1885년 2월 15일 한국 최초의 병원 광혜원이 문을 열었다. 어느날 고종은 알렌 의사의 공적을 구체적으로 찬양하는 결단을 내렸다. “광혜원이 백성 만인의 병을 퇴치한다 하니 알렌 의사의 공적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소. 이에 과인은 알렌을 조선 조정의 참판에 서품하고 궁중어의로 임명하는 바이오.” 알렌은 왕실이 베푼 예우에 대하여 크게 감격했다. 알렌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에게 치료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갔다. 광혜원을 개원하면서부터 그는 매일 100여 명 가량의 환자들을 치료했으며, 거지, 문둥병자를 비롯하여 양반과 왕족에 이르는 모든 계층의 환자들을 치료했다. 알렌의 의료 선교는 직접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 활동은 아니었지만, 이후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여 전도할 수 있도록 손색이 없는 기반을 닦아 놓았다. 알렌은 1887년 주미 한국공사관 고문으로 취임, 1897년 주한미국공사 겸 총영사가 되었고, 1901년 주한미국전권공사가 되었다가,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귀국하여, 1932년 12월 2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