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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초삼청(鮮初三淸)
청백리(淸百吏)가 뽑히기를 바란다
2010년 07월 22일 (목) 07:07:57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방촌(尨村)   황희(黃喜)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하정(夏亭)    류관(柳寬)

청백리(淸百吏)란 조선시대 대신이나 관리 중에서 추천받아 의정부에서 공식으로 인정한 청렴한 관직자를 청백리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염리(廉吏)로 불렸다.
청백리란 청귀(淸貴)한 관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품행이 단정하고 순결하며 자기 일신은 물론 가내까지도 청백하여 오천(汚賤)에 조종되지 않는 정신을 가진 관리이다.
청백리 정신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청렴정신은 탐욕의 억제, 매명행위의 금지, 성품의 온화성 등을 내포하고 있다. 청백리 정신은 선비사상과 함께 백의민족의 예의국가관에 의한 전통적 민족정신이며, 이상적인 관료상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민족정신은 단군 이래 홍익인간적 윤리관에 바탕을 두고 삼국시대의 화랑정신, 고려와 조선시대의 구국항쟁, 그 후 의병활동 등으로 계승·발전했다.
1695년(숙종 21)에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청백리 초선(抄選)을 하면서 살아 있는 경우에는 '염근리', 죽은 후에는 '청백리'라고 호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청백리들이 지켰던 공직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며,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을 매우 중요시했다. 더욱이 이것들은 국가에 대한 사명감과 충성심, 백성을 위한 봉사정신 등 개인적인 생활철학으로 정립되었고, 나아가 공직자의 윤리관으로 확립되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이런 청백리정신을 가진 공직자가 많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선초삼청(鮮初三淸)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세 사람의 청백리, 류관, 맹사성, 황희)

하정(夏亭) 류관(柳寬 1346~1433)

1346년 황해도 문화현에서 삼사판관 류안택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처음에는 학자가 되려고 했으나, 아버지의 말씀(나라가 어렵고 백성이 괴로울 때일수록 올바른 벼슬아치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뜻을 바꾸어 벼슬길에 나갔다. 1369년에 성균시에 급제하였다.1371년에 전시에 장원급제하여 비서교감이란 벼슬길에 올랐다.1387년에 목민관으로 황해도 봉산 군수로 부임하였고 목민관이 된 류관은 벼슬아치로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다.1397년 (태조 6) 대사성에 이어서 형조, 이조의 전서(典書)를 지냈고, 강원도,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원년) 대사헌으로 불교를 극력 배척하였고, 이어 간관을 탄햇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등용되어 1410년(태종 10)에 예문관 대제학으로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14년에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다.1424년 의정부 우의정에 오름.여러차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세종 대왕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아껴 허락지 않았다. 우의정이란 벼슬을 지내면서도 비가 새는 초가집에 담도 없이 산 류관의 성품을 아껴 세종 대왕은 종신토록 국록을 급여하였다.1433년에 임종하자 세종대왕은 친히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흥인문에 나가 제사를 지냈다.

일화
장마때 천장에서 비가 줄줄새자 ,우산으로 비를 막으며 부인에게 " 이 우산도 없는 집에선 어찌 견디겠소" 라고 말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라고 쏘아 붙이자 류관이 껄껄 웃었다고 < 필원잡기 >는 전합니다.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 ~ 1438

온양(溫陽) 출생.
1386년(우왕 12)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검열(藝文春秋館檢閱)·전의시승(典儀寺丞)·기거랑(起居郎)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16년 판서(判書)로 승진, 호조(戶曹)·공조(工曹)를 거쳐 1419년(세종 1)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425년 좌군도총제부판사(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27년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 궤장(杖)을 하사받고, 이듬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 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 하고 35년 노령으로 사임하였다. 같은 시대를 산 황희와 함께 청백리의 상징으로 통하는 맹사성은 우의정, 좌의정까지 오르는 긴 관직생활 동안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해 덕망이 높았으며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세종이 모든 국정을 중단한 채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문상하기도 했다. 태종실록, 고려사, 팔도지리지, 신창경제육전 편찬에 깊히 개입했으며 특히 우리 고유 음악인 향악에 조예가 남달라 조선 초 우리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본받을 점.
우의정에 있을 때 「태종 실록」을 펴냈는데, 세종대왕이 아버지인 태종의 업적이 담긴 실록을 보려고 하자 자신의 벼슬을 걸고 끝까지 바른말을 하여 결국 세종대왕에게 보이지 않았다. 이 당시, 먼저 임금의 업적이 담긴 실록을 후대의 임금이 보지 못하게 한 법이 있었는데, 이것을 맹사성이 끝까지 잘 지킨 것이다. 그래서 임금이 법도를 지키며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닦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맹사성이 얼마나 강직한 사람이었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또한, 맹사성은 성품이 청렴결백하여 집에 비가 샐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했는데, 관리로서 참으로 깨끗하고 공정하게 생활해서 청백리의 본보기로 그 이름이 높았다. 맹사성은 음악에도 뛰어나서, 우리나라의 고유한 음악인 향악의 계통을 정리하고 악기를 스스로 만들기도 했다. 맹사성이 죽은 뒤 세종대왕은 그를 위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게 한 후 '문정' 이라는 시호(훌륭한 사람이 죽었을 때 새롭게 내려주는 호)를 내렸으며, 청백리로 기록하고 그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정문을 세웠다.



방촌(尨村) 황희(黃喜) 1363 ~ 145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 초명은 수로. 자는 구부, 호는 방촌이다.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 군서의 아들이다.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다.

1. 공민왕·태조 대의 관력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가 되었고,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 1389년에는 문과에 각각 급제하고,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는데, 13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을 역임하였다.
398년 문하부우습유 재직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하였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해 초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고,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도사를 거쳐 내직으로 소환되어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2. 태종대의 관력
1401년(태종 1)경 지신사 박석명이 태종에게 천거하여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되었다. 이어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으나, 그해 겨울 군기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곧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해 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로 승천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대사헌을 지냈으며,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질병으로 사직하였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어 송사처리로 인한 육조에의 문책과 함께 파직되었다가 그해 행랑도감제조에 복위되었다.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416년 세자(양녕대군)의 실행을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조판서가 되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1418년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이해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3. 세종대의 활동과 관력
세종의 치세가 진행됨과 아울러 상왕(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으로 소환되고,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고, 판우군도총제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 대사헌을 겸대하고, 1426년 이조판서·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좌의정 겸 판이조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고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된 뒤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를 답사하고, 약산이 요충지라 하여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을 잘못하여 국마 1,000여필을 죽여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의 일에 개입하여 “가볍게 다스려 달라.”고 건의하다가 “일국의 대신이 죄를 다스리는 데까지 개입함은 사리에 맞지 않을 뿐더러, 대신이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니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된 뒤, 한때 파주 반구정에 은거하였다.
1431년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하였으며,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는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리가 깊었으며, 청렴하고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하였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하였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4. 업적과 사후 상황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하여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하여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으며, 종래 원집과 속집으로 나누어져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여 《경제육전》을 펴냈다.
한편, 국방문제에 특히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으며, 예법의 확정에 노력하여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하여 개정·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하여 천첩소생의 천역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그간에 거친 육조정랑·승지·육조판서 등의 역임을 통하여 국정전반에 걸쳐 광범하고 깊이 있는 경험과 식견 및 세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20여년 동안 국정을 총리하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 예문관춘추관 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 등을 겸대하고, 내외의 중심을 진정시키면서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왕을 보좌하여 세종 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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