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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
2010년 08월 10일 (화) 21:25:53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은 의료 선교사이며 교육자이다. 미국 뉴욕 리버티에서 출생하였고, 캐나다인과 결혼하였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44년간을 한국에서 여성의료선교자로서 지냈다. 로제타 셔우드는 홀(1865-1951)1865년 9월 19일 뉴욕 리버티에서 출생하여 리버티의 체스넛릿지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리버티 노멀 인스티튜트, 뉴욕 오스웨고 주립학교를 졸업하고, 초급과 고등학교 교사 자격을 취득하고, 1년간 체스넛릿지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중 인도의 의료선교사였던 여의사 토번(J. M. Thoburn) 여사의 인도로 의료선교에 관한 강의를 듣고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하였다.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로제타 셔우드는 1886년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889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스테이튼 섬의 아동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쳤다. 1889년 11월 어느날, 해외 선교사 훈련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뉴욕 메디슨가 빈민촌 의료선교병원을 찾아온 로제타 셔우드는 간호사 잰킨스의 안내를 받으며 원장실로 들어섰다. 윌리엄 홀은 그녀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 후에 그녀가 건네준 추천서를 갖춘 서류를 펼쳐 보았다.

 로제타 셔우드, 1865년 9월 19일 뉴욕 리버티 출생,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 졸업, “펜실베니아 의대를 나오셨군요.” 윌리엄 홀과 로제타 셔우드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로제타가 메디슨가에서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좀 지나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을 때, 그녀는 닥터 윌리엄 홀의 초대를 받았다. 단둘이 되었을 때 그는 로제타에게 청혼을 했다. 로제타는 너무도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조용하게 거절했다.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의 기도 중에 하나님께 서원한 의료선교의 길에는 결혼 사항이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절당한 그가 얼마나 민망할까 하여 로제타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말해 주었다. “닥터 홀, 나는 어렸을 때 척추에 이상이 있어서 몇번이나 수술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사실은 아직도 완치가 안 된 상태이구요. 의과대학을 다닐 때 목에 결핵성 종양 같은 것이 생겨서 그것도 수술했구요.” 봄꽃 향기 그윽한 어느 봄날 윌리엄 홀은 다시 청혼을 했으나 로제타 셔우드는 그의 청혼을 또 거절했다. “닥터 홀, 나는 해외선교사로 임명받았습니다. 금년 8월에는 한국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규칙은 엄격합니다. 일단 파송받고나면 5년 동안 결혼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여건이 맞지 않으니, 다른 자격 있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십시오.” “나는 셔우드를 처음 보는 순간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힘에 끌려 버린 것 같소. 몇년이 걸려도 기다리겠으니 약혼을 허락해 주시오.” 로제타 셔우드는 닥터 홀을 고용한 눈으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 닥터 홀이 말하는 그 힘에 그녀 역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1887년 10월 메타 하워드(Meta Howard)양이 정동의 이화학당 구내에 부녀자들을 위한 병원 ‘보구여관’을 세우고 의료선교를 하다가 갑자기 병으로 귀국하자, 그 후임으로 로제타 셔우드가 입국했다. 로제타 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는 1890년 10월 13일 월요일 오전이었다. 보트를 타고 배에까지 마중을 나온 사람은 이화학당의 로드 윌러(L. C. Willer)였다. 하필이면 이날이 조대비의 장례일이었다. 그래서 이 지방 사람들 모두가 서울로 몰려가고 없었다 서울의 성문은 오후 7시면 닫혀 버리니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도 없어 제물포에서 하루를 묵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관을 찾아갔다. 중국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에서 그들은 게일(J. S. Gale)을 만났다. “제 친구 펜위크(Fenwick)를 배웅하러 왔던 길입니다.

 내일 제가 서울까지 길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게일이 주선하여 다음날 아침 로제타와 로드 윌러는 가마를 타고 게일은 조랑말을 타고 제물포를 떠났다. 오후 4시경에 서대문을 통과했다. 로제타는 첫 출근을 한 날 4명의 환자들을 진료했다. 다음날에는 9명, 3개월 동안 5백여 명의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녀의 약혼자 닥터 홀(W. J. Hall)이 한국선교사로 내한한 때는 그녀의 입국보다 1년 후인 1891년 12월 16일이었다.1892년 6월 27일,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 양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들은 같은 날 결혼식을 두 번 치러야 했다. 캐나다 사람인 제임스 홀이 아내를 맞는 일이었기 때문에 영국 공사관에서 식을 올렸고, 미국 영사 앞에서 또 한 번 결혼 선서를 해야 했다고 한다. 닥터 홀은 감리교 평양선교기지 개척담당자로 임명되었고, 닥터 로제타 셔우드는 서울에서 계속 근무를 해야만 했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도보로 한 주간, 그 험한 길을 오가며 닥터 홀이 서울에 머무는 기간은 두 주일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 후 1894년 5월 닥터 홀 가족은 평양에 모여 살림을 시작했다. 그해 7월, 청일전쟁이 일어나서 평양은 전쟁터가 되어 수많은 사상자들이 나왔고, 닥터 홀은 환자들을 돌보다가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로제타는 정성을 다해 치료했으나 사랑하는 남편은 영영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가 1894년 11월 24일이었다. 남편이 죽은 후 로제타는 첫 돌이 겨우 지난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그녀는 장을 앓고 있었는데, 그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병원을 설립함으로 로제타 셔우드는 1897년 11월에 다시 한국에 나와서 남편의 유산과 그의 별세 후에 들어온 조의금을 가지고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병원(기홀병원)을 세웠다. 폴웰(E. D. Folwell) 의사가 원장이되었고, 부인과는 닥터 로제타 자신이 직접 맡아 보았다. 1898년 5월에는 평양에다 여자병원인 광혜여원(廣惠女院)을 세웠다. 한국 최초의 맹인 점자교육을 실시했다. 닥터 로제타는 광혜여원에서 맹인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 취미삼아 배워두었던 “점자 사용법”을 이용하여 한글 맞춤법에 맞추어 “점자법”을 만들고, 한국 맹인들을 위하여 기도문, 십계명, 초등교과서 등을 만들었다. 이것이 곧 한국 최초의 맹인 점자교육으로 닥터 로제타는 이 사업을 맹인 기술교육과 나란히 운영하여 1906년에 이르러서는 정규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로제타 홀 여사는 한국에서 농아교육도 처음 시작했다. 그녀는 1906년 이익민을 중국에 보내 농아교육방법을 배워오게 한 다음, 1907년 한국 최초의 농아학교를 세웠다. 이보다 앞서 닥터 로제타는 1890년 한국에 도착하여 당시 김점동(박 에스더)이라는 여자아이를 자신의 통역 겸 간호원으로 키웠다. 이 여성(1876. 3. 16~1910. 4. 13)은 서울 태생이었다. 닥터 로제타는 남편과 같이 1894년에 평양에 갔을 때에도 이 여성을 데리고 갔으며, 미국에 갔을 때에도 이 여성을 데리고 가서 의과대학에 입학시켰다. 로제타의 도움으로 이 여성은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될 수 있었다.

 닥터 로제타는 1917년 서울로 와서 보구여관의 후신인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일하였고, 1920년부터 여자의사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오늘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하였다. 닥터 로제타 여사는 1930년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한국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 로제타 셔우드는 25세 꽃다운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와서 40년 동안 여의사와 교육가로서, 이 땅에 젊음과 눈물과 땀과 정성과 애정과 일생을 다 쏟아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세 살 난 유복자를 이 땅에 묻어 놓고, 65세의 백발이 되어 한국을 떠날 때에는 외아들과 자부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웠다. 미국으로 간 그녀는 1943년에 은퇴하여 뉴저지 양로원으로 들어가 여생을 지내다가, 1951년 4월 5일에 85세로 별세하였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로제타 셔우드의 유해는 남편과 딸 에디스 마거리트(Edith Margaret, 1895~1898)가 잠들어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녀는 남편의 전기 『윌리엄 제임스 홀의 생애(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D.)』, 『뉴욕 빈민촌 의료선교(Medical Missionary to the slums of New York)』, 『평양개척선교사(Pioneer Missionary to Pyong Yang, New York, 1897)』를 썼으며, 그 밖에도 20여 편의 논문을 썼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은 미국 현대 여성 200인 중에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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