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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 선교사(Robert A. Hardie1865-1949)
2010년 10월 20일 (수) 18:00:48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하디(Robert A. Hardie1865-1949)는 1865년 6월 11일,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 칼레도니아에서 출생했다. 그는 1886년 토론토 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요나단 에드워드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18세기 미국의 대부흥 운동(대각성 운동)은 19세기 중엽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의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1806년에 미국 윌리엄스 대학(Williams College) 안에 신앙 동우회가 조직되었고, 1810년에는 미국 외지 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 남북전쟁이 끝난 뒤 1886년에는 매사추세츠 주 마운트 허먼(Mount Hermon)에서 제1회 하령회(夏令會, Summer Conference)가 열렸다.

이 하령회의 주도자는 유명한 부흥사인 동시에 시카고 YMCA 지도자이던 무디였으며, 미국과 캐나다의 87개 대학에서 251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이 외친 구호는 “모두 가자, 모두에게로(All should go, and go to all)”였다. 이 학생 하령회가 있은 지 3년째 되는 해(1888~1889)에는 ‘학생 외지 선교단’(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이 발족되었으며 그 구성원은 각 대학 YMCA, 미국 신학교 선교 연맹, 캐나다 대학 선교 연맹 등 4개의 초교파 학생단체들이었고 이때에 학생 대표로 활약했던 모트(John R. Mott)와 라이언(D. Willard Lyon)은 한국 YMCA 창설의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인물들이었다.


이때 아시아 여러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모두 119명으로 그 중 69명은 중국에, 46명은 일본에, 7명은 한국에 파송되었다. 한국의 초대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가 이 “외지 선교 자원단”의 영향 하에서 성장한 인물들이었다. 그중 캐나다 토론토 대학 YMCA 파송으로 온 게일(J. S. Gale)은 마운트 허먼 학생 하령회에 참석하여 무디의 설교를 듣고 한국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하였고, 게일의 학교 후배 하디도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서 대학 공부를 하였다. 하디는 1887년 켈리와 결혼하였으며, 1890년 9월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와서 잠시 제중원에서 일하다가, 1892년 11월 원산에서 의료선교활동을 시작하여 1898년 캐나다 대학 선교회와의 계약기간(8년)이 끝나고 미국 남감리회 선교회에 소속되었다. 원산 기도회는 1903년 겨울, 한국을 잠시 방문한 스웨덴의 프린스 목사와 중국에 체제중인 남감리교 선교사 화이트(Miss M. C. White) 여사와 함께 원산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도와 성서 연구를 위해서 한 주간을 지낸 일이 있었다. 그 후에 이들은 장로교회와 침례교 선교사들과 교인들까지 연합하여 창전교회에서 한 주일 내내 밤 집회를 하면서 보냈다. 이때 하디(R. A. Hardie)는 강원도 북쪽에서 몇 해 동안 애써 일했으나 결실을 못 맺은 사실을 고백하다가 선교사로 오게 된 자신의 동기를 반성하고 자책하던 중에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 체험은 죄에 대한 깊은 강박관념이었다. 그는 비로소 구원에 대한 확실한 체험을 하게 되었고 이 구원의 감격을 혼자서 간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 구원의 체험을 동역자 선교사들에게 간증하게 되었고 간증을 듣고 그의 동역자들도 은혜를 받았다. 그는 이번에는 한국 교인들 앞에 나가서 간증함과 동시에 자기의 죄를 부끄러움 없이 공공연히 고백하였던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피선교지의 한국인 앞에서 이런 공개적인 자기 죄의 고백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성령의 강권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의 깊은 신앙 체험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 교회가 처음 세워진 곳에서 애써 일하였으나 선교 사업에 실패하였다. 이 실패감은 나에게 헤아릴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기진맥진의 상태에 이르렀다.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 첫 주일 아침 예배 시에 우리 원산 교인들 앞에 섰을 때 얼굴에 부끄러움과 혼돈을 띠고 나의 교만을 고백했다. 그리고 마음의 완악함과 믿음의 부족함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빚어낸 많은 잘못에 대하여 고백했다. 이때 그들은 생전 처음으로 실질적 경험에 있어서 죄의 자각과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또 다음 3주 동안에 내 경험과 내 생활에 있어서 분명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그들이 보았을 때 그들은 믿음에 대한 새로운 교훈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도 배웠다.” 1904년 봄에도 원산 집회는 반복되었다.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의 연합 사경회 중 장로교의 로브(A. F. Robb) 목사가 특별한 감회에 젖어 한국인으로서 역시 은혜에 접한 전계은과 함께 원산 거리를 누비며 가슴을 치면서 통회하며 전도했고, 감리교의 정춘수 역시 원산 거리를 왕래하면서 감격과 열의로 이 성령의 은사를 선포하였다. 평양의 오순절이 1906년 8월, 평양의 선교사들은 하디를 초청하여 집회를 가졌다. 시련의 때에 선교사 자신들의 선교 태도에 불명료와 주저의 기색을 스스로 자책하면서 진행된 이 집회에 웨일즈와 인도 지방에서의 놀라운 부흥의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북받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갈망이 평양 교회의 언저리에 짙게 깔려가고 있었다. 사경회의 영향, 국가의 비운에 통회하는 기독교인의 내성(內省), 하나님의 도움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는 신앙에서 이 부흥의 물결은 도도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1906년 8월, 평양의 선교사들은 하디를 초청하여 집회를 가졌다. 시련의 때에 선교사 자신들의 선교 태도의 불명료와 주저하는 기색을 자책하면서 진행된 이 집회에 웨일즈와 인도 지방에서의 놀라운 부흥의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북받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갈망이 평양 교회의 언저리에 짙게 깔려가고 있었다. 사경회의 영향, 국가의 비운에 통회하는 기독교인의 내성(內省), 하나님의 도움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는 신앙에서 이 부흥의 물결은 도도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성령운동의 극치는 1907년 1월 평양에서 열렸던 대사경회에서 일어났다. 사경회는 10일간 계속하도록 계획되었다. 그리고 종전에 하던 방식대로 성서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저녁 집회는 특별한 전도설교에 집중하였다. 바로 이 저녁 집회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저녁 집회에는 1,500명이 모였다. 1월 14일 월요일 저녁 집회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다. 이 저녁 집회는 리(Graham Lee) 목사가 인도하였다. 그가 두세 사람에게 기도를 하라고 요청하였을 때에 수십 명이 자연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미 모두가 기도를 하고 싶은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리 목사는 다 같이 통성기도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랬더니 그 많은 회중이 일제히 성령의 힘에 이끌리어 큰 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폭포수 같은 기도 소리가 그 회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기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부끄러움도 자존심도 다 없어진 순간이었다. 또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마루에 쓰러져서 주먹으로 마루를 내려치기도 했다. 때로 죄를 고백한 다음에는 전원이 통성기도를 하였고 이 기도는 통곡소리를 동반하였다. 이 광경은 참으로 형용하기 어려웠고 또 모두가 한결같이 진지하였다. 통성기도와 죄의 고백, 그리고 자기 죄에 대한 애통과 통곡이 계속되었어도 아무도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고, 기대해 보지도 못한 장면이었다. 이렇게 저녁 집회는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집회는 다음날 화요일 저녁에도 계속되었다. 오히려 그 열기는 전날보다 더 뜨거웠다. 이 집회 인도자의 한 사람으로 이 장면을 목격한 장로교의 블레어(W. N. Blair) 목사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기록하고 있다. “내가 전에 결코 보지도 못했고 또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보는 것이 절대로 필요할 때까지는 다시는 보기를 원치 않을 그런 종류의 집회가 시작되었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격정으로 몸을 떨며 몸과 마음의 고뇌 속에서 범죄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밝은 빛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그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비춰보았다. 부끄러움과 슬픔, 또 자기 증오가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을 때까지 그들의 죄가 그들의 모든 악 속에서 들고 있어났다. 자존심은 다 없어졌다. 그들이 배신한 하늘에 계신 예수를 쳐다보면서 그들 스스로를 때렸다. 그리고 통곡하면서 ‘주여! 주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시옵소서’라고 외쳤다. 그 외의 어떤 일도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비웃음, 범법에 대한 형벌, 죽음까지도 만일 하나님만 용서해 주신다면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죄에 대한 공개 간증에 관한 우리의 요망과 또한 바람직하지 않음에 대하여 우리는 원칙을 가져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성령)이 범죄한 영혼 위에 임할 때에는 죄에 대한 고백이 있을 것이고 이것을 땅 위에 있는 어떤 힘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알고 있다.” 이런 뜨거운 성령의 불길은 학생들과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전파되었다. 이 성령 운동은 남학생 사이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학생들에게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계층과 연령을 초월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는 이후에도 모든 지방에서 계속되었다. 죄를 고백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동시에 이들의 생활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회개한 술주정뱅이가 술병을 깨고 평생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기로 결심하는가 하면, 도박꾼은 화투를 찢어버리고 성경공부에 열중하였다. 며느리를 구박하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손을 붙잡고 용서를 빌었다. 또한 그 동안 훔친 남의 물건이나 돈은 다 먼저 임자에게 돌려주고 용서를 빌었다. 그들은 친구, 친척집을 돌아다니면서 용서와 화해를 구하였고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마음의 변화와 기쁨에 대하여 간증하고 전도하였다. 원산 해변에서 시작된 성령의 불길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전국을 휩쓸게 되기까지는 평양의 길선주의 역할이 컸다. 1907년 9월, 장로교 평양 신학교에서 길선주를 비롯한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어, 장로교 최초의 7인의 목사가 한국교회 초유의 부흥사로 등장하는 동시에 부흥운동은 서울, 의주, 만주에까지 번져나가 전국적인 성령 운동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의 바탕은 사실상 1903년과 1904년 초에 걸쳐 일어난 원산 부흥 운동이었으며, 그 주역이 곧 하디 선교사였던 것이다. 하디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으로 선교 사업에 임한 자신의 활동에 대해 철저한 회개를 하고 소명감에 불타는 새로운 선교 자세를 가지게 된 자신의 성령 임재 체험을 간증했다. 이것은 선교사들간에 널리 회개 운동으로 퍼졌고, 결국은 ‘한국교회의 오순절’이라 불리는 1907년 대부흥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하디는 1909년부터 1922년까지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1916년 신학 세계를 창간하였으며,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 예수교서회 총무일을 보았다. 1935년 은퇴 후 귀국하여 1949년 6월 30일에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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