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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 선교사(Samuel Foreman Moore 1860-1906)
2010년 11월 10일 (수) 04:03:36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무어(Samuel Foreman Moore 1860-1906)는 1860년 9월 15일, 미국 일리노이 주 그랜드 릿지(Grand Ridge)에서 태어났다. 1889년에 몬타나 대학(Montana College)을 졸업하고, 이어서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1892년에 졸업했다. 당시 미국은 무디의 부흥 운동으로 젊은 신학도들이 선교의 정열에 불타고 있었던 때였다. 무어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고, 1892년 8월 16일, 부인 로즈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892년 9월 18일, 한국에 입국했다.

그의 한국말 공부는 동료 선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말을 빨리 배우기 위해서 서양인들과 한국인 구경꾼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할 필요를 느낀 그는 자기 집에서 여러 마일 떨어진 조그만 한국인 집에서 한국말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지 불과 몇 주일 안에 자기집 가정부를 신자 되게 했으며, 6개월만에 한국인들과 대화하고, 교회에서는 한국말로 기도를 할 수 있을 만큼 한국어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매일 아침 그는 20~30명의 한국인들과 만나 사귀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다.

오후에는 서울 거리에도 나가고 한강 유역에 있는 마을에도 찾아가서 전도했다. 무어 선교사는 1892년 겨울에 곤당골에서 고아 6명으로 남자 학교를 시작했다. 무어가 한국에 온 지 2년째 되는 1893년에는 곤당골 교회를 창설했다. 창설 교인은 16명이었고 연말에는 43명으로 늘어났다. 새문안교회에 이어 두번째로 세워진 장로 교회였다. 박성춘의 입교를 하다. 당시 박가(朴歌)라는 백정이 있었다.

백정은 본래 이름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는 1862년경에 서울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주교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그는 자기 아들 ‘봉주리’만은 천주교 학당에 보내어 공부를 시켜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천주교 학교에서는 돈을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망설이고 있다가 곤당골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학당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그 학당에 자기 아들을 보냈다. 이 학교가 바로 무어 목사가 세운 곤당골 교회의 예수학당이었다.(곤당골은 고운담골의 줄임말로 고운 담으로 연결된 집들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미동(美洞)이라고도 했다.) 봉주리는 학당에 다니면서 학당에서 책들을 구입하여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다.

아버지 박씨도많은 기독교 서적을 읽으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눈을 뜨기 시작했다. 1894년 어느 날 봉주리 아버지 박가(朴歌)가 열병(발진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였다. 열은 열로 고친다고, 더운 방에서 몸을 지지며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고 있을때 아들 봉주리가 이상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 사람이 닥터 에비슨(O. R. Avison)이었다. 무어 선교사와 닥터 에비슨은 박가(朴歌)가 완쾌될 때까지 왕진을 계속하며 보살펴 주었다. 그는 임금님의 주치의 닥터 에비슨이 자기 같은 천민을 치료하러 누추한 집에까지 온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경을 헤매던 박가는 닥터 에비슨의 정성어린 치료로 병상에서 일어나 무어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박가(朴歌)는 1894년 무어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곤당골 교회에서는 그에게 성춘(成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승동교회 100년사』에는, 1894년 박성춘이 첫 세례를 받았는데, 백정 박가의 입교는 우리 교회사에 큰 의의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5년 박성춘의 전도로 백정의 입교가 늘어나자 교회 내에서 말썽이 일어났다.

양반 계급의 교인들이 천민 계급의 백정들과 같이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면서 교회 출석을 거부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무어 목사는 깜짝 놀랐다.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간곡히 만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약 한 달 뒤 그 중의 한 사람이 찾아와서 만약 자기들을 앞자리에 앉도록 좌석을 구별해 준다면 교회에 출석하겠다고 했으나 무어 목사가 그 제안을 거부하자 그들은 마침내 아주 갈라져 나가서 홍문동(옛날 홍문섯골이라고 불리워오던 홍문동, 지금의 광교 조흥은행 본점 뒷골목 근처였다고 함) 교회를 세웠다. 이때가 1895년 4월 20일이었다. 양반들이 곤당골 교회를 이탈해도 무어 목사는 탄식만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자매이건만, 인간적 제도의 차별을 내세워 신령한 형제됨을 거부한 양반들을 옳다고 인정할 수도 없고, 잘못했다고 치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까운 인물들을 포기해 버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뜻밖의 일이 생겼다. 1898년 6월 17일 돌발적인 화재로 곤당골 교회당이 불에 탔다. 이 화재는 곤당골 교회와 홍문동 교회가 다시 화합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1895년에 갈라져 나갔던 홍문동 교회 교인들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곤당골 교회와 합하여 중앙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그 뒤에 승동교회로 발전했다. 백정 해방 운동은 1898년 교인은 108명으로 불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 백정 출신 교인 수는 30명이었다. 무어 목사는 5백 년간 사람 대접을 못받던 백정들로 하여금 인권을 되찾게 하는 백정 해방 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박성춘 등 백정들은 백정들의 해방을 위하여 1895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정부에 호소문을 올린 일이 있었다. 백정 해방 운동 1898년에 교인은 108명으로 불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 백정 출신 교인수는 30명이었다. 무어 목사는 5백 년간 사람 대접을 못받던 백정들로 하여금 인권을 되찾게 하는 백정 해방 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박성춘 등 백정들은 백정들의 해방을 위하여 1895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정부에 호소문을 올린 일이 있었다.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있었다. 이 개혁에 있어서 특히 중요한 내용은 사회제도의 개혁이었다. 양반(兩班)과 평민(平民)의 신분(身分)을 타파하였고, 백정과 광대 등 천민신분의 폐지와 함께 공사노비(公私奴婢) 제도를 없애고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1894년 12월부터 1895년 7월까지 제2차 개혁을 단행하자, 백정 박성춘은 내부(內部)에 소지를 올렸다. 박성춘은 백정이었으며 백정들의 조합(組合, guild)인 승동도가(承洞都家)의 우두머리였다. 박성춘은 1895년 4월 12일 내무아문(內務衙門, 내무부)의 대신(大臣)에게 소지(訴志)를 한 통 보냈다. 그가 발송한 소지(訴志)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비천한 종들인 우리는 500년 남짓 백정일을 생활수단으로 살아왔습니다.

연례적인 대제(大祭)때마다 조정의 요구에 순응해 왔지만 항상 우리는 무보수였고 가장 천대받는 일곱 천민 중의 하나로 취급받아 왔습니다. 다른 천민계층은 도포와 갓과 망건을 쓸 수 있으나 우리에게는 아직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심지어 지방관아의 아전들은 재물까지 수탈해가곤 합니다. 만일 그들의 요구에 불응하면 갖은 행패를 다 부리고, 때로는 관가에 잡혀가서 희롱을 당하고 욕을 먹으며 억지로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삼척동자에게까지 하대를 받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 이런 고통이 있겠으며 그 외에도 우리가 당하는 수없는 천대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보다 낮은 계층인 광대조차도 갓과 망건을 쓰는데 유독 우리들만 허용되지 않고 있으니 그 한이 뼈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이제 듣건데 대감께서는 옛 악습을 폐하고 새 법을 만드신다고 하옵는데 이것 때문에 당신의 비참한 종들이 희망을 가지고 주야로 열망하며, 지금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사오니 각하께서는 저희들이 갓과 망건을 쓸 수 있게 한 이 특별한 법이 전국 어디에서나 알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지방관아 아전의 학대를 금하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이 호소문에 대한 응답인 즉 ‘이미 포고문을 발표한 바 있으니 금후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이듬해 3월 또 다른 호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인즉 ‘다른 천민들은 다 민적에 오르게 되었는데 당신의 비천한 이 충복들만은 인구조사에서 빠졌으니 갓과 망건을 쓰게 되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외모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되었지만 실속은 그렇지 못합니다. 간절히 바라옵기는 우리도 민적에 오를 수 있도록 두루 살펴 주시고, 은혜 내려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에 대한 응답인 즉 ‘온 백성이 다 한결같은 나라 백성인데 어찌 너희들의 염원을 거절할 수 있으며, 너희들의 고생을 모른 척 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었다. 이 회신은 실의에 빠져 있던 무어 목사와 백정 박성춘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야 백정들이 사람다운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무어 목사는 당시 백정들이 기뻐했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을 들었던 흑인들의 기쁨도 앞으로 갓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조선 백정들의 기쁨만큼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백정은 너무 좋아서 밤낮으로 갓을 쓰고 있었다.’ 1895년 5월 13일에는 지방에도 포고문이 붙었다.

박성춘이 올린 소지가 열매를 맺어가고 있었다. 서울에 포고문이 게시된 것은 6월 6일이었다. 이 시기는 제2차 갑오경장기에 해당한다.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의 주도하에 모든 문물제도가 개혁이 되고 있었다. 백정 박성춘은 너무 기뻐서 무어 목사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원받은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경우이고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다.”고 하였다. 박성춘은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우선 시골에 살고 있는 백정들에게 자신들의 신분상의 해방이 가까워지고 있는 사실을 편지로 띄웠다. 편지에서 박씨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 위대한 축복이 곤당골교회로부터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백정들이 너무 기뻐하여 득의양양하다가 다른 평민이나 양반들과 충돌하지 않도록 하라고 충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편 무어 목사도 전국 방방곡곡에 보낼 360여 장의 포고문(布告文) 제작을 위해 자신의 돈을 지불했다. 무어 목사도 새 힘을 얻었다. 이제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무어 목사는 그것을 “참으로 가장 낮은 자는 위대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박성춘의 전도하다. 박성춘은 그냥 앉아서 혼자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무어 목사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박씨는 전국에 산재한 약 3만 명의 백정들에게 전도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실천하였다. 1895년 10월 13일, 무어 목사는 수원에서 감격적인 체험을 하였다. 수원 주변에 살고 있는 백정들을 모으니 약 50명이 되었다. 박씨는 이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가를 간증한 후, 무어 목사로 하여금 예배를 인도하도록 하였다. 50명이 집에 다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일부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예배를 드렸다. 박성춘은 이제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다. 한 손에는 백정을 해방한다는 포고문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백정들에게 자신을 내어놓았다. 신문에 기사도 싣고 관민공동회에서는 재설군(宰設軍)을 대표하여 연설도 하였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요, 무지몰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평민(利國平民)의 길인즉 관민(官民)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可)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遮日)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견고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조(國祚)로 하여금 만만세를 누리게 합시다.” 수천 명이 모인 민중대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백정이 개막 연설을 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위 호소문은 물론 박성춘 등이 정부에 제출한 호소문의 원문은 아니고 무어 목사가 그것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박성춘 등은 호소문을 지을 만큼 유식한 사람들도 못 되었기 때문에 무어 목사와 그의 어학 선생의 도움으로 호소문을 작성하여 제출했던 것이다. 무어 목사의 백정 해방 운동은 성공하여 백정들은 그때에 비로소 국민의 자격을 얻게 되었으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민적에 오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갓도 쓰고 망건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법률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박성춘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서울에서 수원까지 전도 구역을 확대하여 수백 명의 백정들이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박성춘은 1911년 12월에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한편 그의 아들 박서양은 신학문을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받은 행운아가 되었다. 그는 곤당골교회 예수학당을 나온 뒤 1899년 제중원의학교, 즉 오늘의 세브란스의대에 입학하여 1908년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평양 장로교 신학교 교수 시절, 무어 목사는 1학년 학생들에게는 창세기를 가르쳤고, 2학년 학생들에게는 민수기와 열왕기를, 3학년 학생들에게는 영국 역사를 가르쳤다. 그는 영국의회주의 정치제도를 강의하며 학생들에게 자유 사상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그는 동료 선교사들에게서 따돌림을 받아 몹시 고독한 생활을 했으며, 한국인 양반들에게서도 미움을 받으면서 자기의 사명에 충실했다.무어 목사는 병들고 가난하고 억눌림을 받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다가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1906년 12월 22일 제중원에서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의 묘 앞에는 그가 개척한 승동 교회와 마포 동막 교회가 공동으로 세운 기념비가 서있다. ‘Moore 선교사 추모비 S. F. Moore 선교사는 그의 부인 Rose Ely 여사와 함께 1892년 9월 21일 32세때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 그들 부부는 남달리 서민과 천민층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였고, 1893년 3월 19일, 16명의 교인들과 곤당골에서 첫 공식 예배를 드렸으니 그것이 승동 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그는 백정들의 인권을 찾아주려고 1896년 고종황제에게 백정 신분 제한 철폐의 탄원서를 올려 윤허를 받아 그들의 신분 향상에 크게 공헌한 바도 있다. 그는 또한 기쁜 소식이란 나룻배로 한강을 오르내리며 3년간 전도하여 1900년 초에 25개처에서 회집 인도했다. 그 중 마포에 세워진 동막 교회는 1906년 12월 22일 그가 소천되었을 때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지정한 그의 기념 교회이다. 이 나라 개신교사에 길이 빛날 그의 공로를 기리며 그의 첫 열매인 승동 교회와 마지막 열매인 동막 교회가 힘을 합하여 이 추모비를 세운다.’ 1989년 4월 15일 승동 교회 동막 교회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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