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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드 선교사(William M. Baird, 1862~1931)
2010년 11월 23일 (화) 18:25:02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베어드(William M. Baird)는 1862년 6월 16일 미국 인디아나 주에서 출생했다. 1885년 하노버 대학(Hanover College)을 졸업하고, 1885년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Seminary)에 진학하여 1888년 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1890년 11월 18일 애니 아담스(Annie Adams) 양과 결혼했다. 베어드는 원래 중국 선교사로 가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나 북장로교 선교본부는 베어드에게 부산 지방 선교사로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베어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1890년 12월에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그의 아내와 함께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그 이듬해인 1891년 1월 29일이었다. 부산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한 후 서울로 향했고, 1891년 2월 2일 인천항으로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매년 개최되는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연례 회의는 베어드의 서울 도착 다음날인 2월 3일에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베어드는 공식적으로 부산지부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언더우드와 베어드는 부산에 선교부지를 매입하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부산 선교부 설치하고 이들은 한국인 이씨와 함께 1891년 3월 부산에 와서 부지 매입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1891년 9월, 미국 영사관의 협조로 부산항에서 그리 멀지않은 일본인 거주지 밖에 있는 영선현의 땅을 매입할 수 있었다. 이 땅이 북장로교의 부산경남 지역 선교 거점이 되었고, 베어드는 1891년 9월 부산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베어드가 부산에 왔을 때는 게일이 부산을 떠난 후였기 때문에 서구인이라고는 영국 세관원이 헌트(J. H. Hunt)와 하디 가족뿐이었다. 하디는 거처할 마땅한 집이 없어서 세관 당국에 의해 영도(deer island)에 콜레라 병원으로 지은 작은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 집은 원래 선박으로 입국하는 외국인으로 하여금 임시로 거주하게 하고, 또 콜레라에 감염되었을 경우 격리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으나 하디가 부산에 왔을 당시는 환자가 없었으므로 임시로 이 집에 거주하게 배려했던 것이다. 이제 막 부산에 도착한 베어드는 얼마 동안 하디 집에 유하였고, 하디가 일본인 거류지역 내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고 옮겨갔을 때 베어드도 함께 갔다. 그 후에 부산경남 지방에는 콜레라가 만연하였고 베어드의 일기를 보면 “거의 매일 이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화장하는 연기가 이곳저곳에서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보았다.”라고 했을 만큼 전염병의 피해가 심각하였다.

1892년 3월 베어드는 앞서 구입한 부지에 지은 미완성된 선교사관으로 옮겨갔다. 북장로교가 매입한 이곳 영선현은 북장로교 선교의 중심지이자 후일 초량교회 태동의 모체가 된 곳이기도 하다. 베어드는 이제 비로소 선교관을 확보하였으므로 다소 안정된 가운데 부산 선교의 기초를 닦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첫 아이 낸시 로즈(Nancy Rose)가 1892년 7월 5일에 태어났는데, 그는 부산의 유일한 외국인 아이였으나 2년 후인 1894년 5월 13일에 사망하였고, 데이비스의 묘지가 있는 복병산에 묻혔다. 한국에서 초기 선교사들은 지역 답사와 순회 전도 활동을 통해 신자를 확보해 갔는데, 베어드도 광범위한 지역을 순회하는 전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방을 개방하여 전도를 위한 접촉점으로 삼았다. 또 한국인 전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했는데, 한국 초기 신자 중 한 사람이자 초기 매서 전도인이었던 서상륜(徐相崙)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서상륜은 1892년 5월 12일 부산에 와서 6월 17일까지 베어드와 함께 순회 전도 후 서울로 돌아갔고, 그 이듬해 4월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徐景祚)가 베어드를 돕기 위해 부산에 와서 두 달간 함께 일했으나 그 역시 건강이 여의치 못하여 그해 6월 16일 서울로 돌아갔다. 그 후 베어드와 함께 일한 전도자는 황해도 장연 출신인 고학윤(高學崙)으로 그는 1893년 이후 베어드의 조력자로 봉사하였다. 그가 방문했던 지역은 김해, 진주, 동래, 울산, 밀양, 대구, 상주, 안동, 경주 등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등 전라도 지방이었다. 이런 지역 순례를 통해 후일 그는 대구 지방 선교지부를 열게 된 것이다. 베어드는 매우 능력 있는 인물이며 개척자적인 능력을 겸비한 인물로서 부산 지방 선교의 기초를 놓았다. 영선현(영선) 교회 설립하고 베어드 선교사는 영선현을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는 중에 하디 의사가 이 일을 도우므로 신자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공집회(公集會)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영선교회, 영선현 교회, 혹은 영주동 교회라고도 불린 지금의 초량교회의 시작이 된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1년 9월에 지금의 영주동 지역인 영선현에 선교 부지를 확보하고, 그곳에 선교관(선교사의 주택)을 건축했는데, 이듬해 4월 15일경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방을 중심으로 전도한 결과 신앙 공동체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영선 혹은 영선현 교회이다. 베어드 선교사는 아내의 산후(産後) 조리가 끝나는 11월부터 자신의 집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등 그간의 노력의 결실로 몇 사람과 더불어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는 집회 형태를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초량교회 최초의 예배가 되어, 초량 교회 100년사에서 “초량 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파송한 윌리엄 베어드 (W.M. Baird) 목사에 의하여 1892년 11월에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어드는 1891년 입국한 이래로 1895년까지 4년간 부산에서 일하다가 서울로 옮겨갔다. 선교본부는 베어드 선교사를 교육 사업의 적임자로 보고 이 일을 맡기기 위해 서울로 이동시킨 것이다. 이 때부터 그의 선교는 교육 사업으로 집중되었다. 그는 서울 곤당골에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이미 있던 예수교 학당도 맡았다. 그러나 이 학교들은 모두 고아를 상대로 했고 또한 안식년이 되어 잠시 한국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곧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숭실학교 설립하고 베어드는 1897년 10월 평양에서 숭실학교를 시작했다.

그는 1897년 10월 10일 평양 신양리 자택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을 데리고, 숭실학당을 개설하여 1900년에는 4년제 중학교로 발전시켰고 1904년에 중학교 첫 졸업생을 내게 되었다. 그리고 1905년부터는 대학교육을 시작하여 미국 장로교 선교부와 감리교 선교부가 합동으로 학교 운영을 하기로 결의하였고 1908년에 2명의 첫 졸업생을 내었다. 이 학교가 그 뒤 숭실 대학으로 발전했다. 숭실 대학은 장로교뿐만 아니라 여러 교파가 합동 경영을 했다. 이러한 합동 경영은 감리교와는 1914년까지 계속되었고 나머지 선교부들과는 1938년 폐교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숭실학교는 베어드 교장의 엄격한 학칙 준수와 철저한 기독교 교육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특히 성경 공부와 주일 예배는 엄격한 규율 아래 철저히 지켜졌는데,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출석부에 도장을 찍어서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음을 확인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학교의 특색은 학생들의 학자금 자급 제도와 자립 정신에 있었다. 베어드 박사는 숭실학교 경영의 이상적인 표본으로 미국 미조리 주의 장로교계 학교인 파크 대학(Park College)과 포이넷트 중학교(Paynette Academy)를 삼았다. 이 학교들은 학생지도관에서 일주일 동안 일정한 시간을 학생 전원이 작업을 하도록 하고, 그 수입으로 학생들이 자력으로 학자금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배운 기술을 졸업 후 활용하도록 했다. 베어드 박사는 이것을 그대로 적용시키지는 않고 한국 사정에 맞추어 시행했다. 미국 인디아나 주의 한 농촌 소년이었던 그는 육체 노동을 천시하고, 앉아서 글만 읽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생각을 개혁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여기고 교내에다 소위 자조 사업부를 두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근로와 자조 정신을 불어넣어주는 것을 제1의 교육 목적으로 삼았다. 교육 정책을 세우고 베어드 박사가 교육 사업에 성공한 이면에는 두 가지의 큰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그의 창의적인 교육 정책이요, 또 다른 하나는 네비우스 선교 방법(Nevius Method)을 한국 실정에 맞도록 적당히 수정하여 적용시킨 것이다. 베어드 박사가 다음과 같은 교육 정책을 내세웠다.


첫째, 학교 교육은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분야를 가르치는 교육이어야 하며,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감당케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둘째, 학교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종교적인 정신적 발육이어야 한다.

셋째로, 선교부가 경영하는 학교의 중요 목적은 토착 교회 발전에 두어야하며 더 나아가서 인근 사회에 기독교 신앙을 심어주는 데 있어야한다.

이러한 세 가지 교육 정책을 설명하면서 베어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학생들이 위 세 가지 교육 원칙대로 잘 훈련만 되면 졸업 후 그가 농부가 되든지 제철공이 되든지, 혹은 의사, 교사, 공무원 등 무엇이 되든지 그들은 전부 자기 직업을 통하여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들은 학생들이 전도자가 되게 하는 것을 우선적인 사명으로 해야 하지만, 거기까지는 못 간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건전한 국민이 되게 하는 데는 성공해야 한다.” 네비우스 선교 방법 도입하고 베어드 박사가 성공한 또 하나의 이유는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교육에 적용시킨 것이었다. 네비우스 선교 방법이란 교회로 하여금 자력 유지(Self-Support), 자진 처리(Self-government), 자진 전도(Self-propagation)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언더우드 박사는,


첫째, 각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래의 직장이나 직업에 그대로 남아있어 자급자립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한 몫의 일꾼이 되게 하며 그 인근 친척 중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실천하도록 가르친다.

둘째, 본토 교회의 운영과 기구 조직은 그 교회 자체의 능력 범위 안에서 발전시킨다.

셋째, 교회 자체가 교회 일꾼과 재정을 공급할 수 있을 때에만 유자격 전도자를 채용한다.

넷째, 본토인으로 하여금 자력으로 교회 건물을 짓게 하되 건축 양식은 본토식으로 하고 그 규모는 그 능력 범위 안에서 한다고 설명했던 것이다.
베어드 박사는 1917년부터 주로 문서사업에 종사했다. 또한 그는 이듬해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는데 그 부인도 역시 훌륭한 문필가였다. (베어드 여사; 1864년 9월 15일생으로 1883년 웨스턴 여자대학 졸업, 1884년 하노버 대학 졸업, 1885년 위쉬번 대학 졸업, 1916년 6월 9일 별세)5남매의 현모이자 양처였던 그녀는 남편의 교육 사업, 전도 사업을 훌륭히 도와 교과서 번역도 하고 선교사들을 위하여 한국어 지침서를 만들었다.아내를 잃은 뒤 베어드는 1918년 재혼을 했다. 페틀로프(Rose May Fetterolf)양이 곧 그의 후처였으며 베어드의 훌륭한 내조자였다. 베어드는 주로 성서 번역에 열중했다. 그는 시카고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 신학과에서 다시 히브리어 공부를 했고 한국에 나와서는 김인준 목사, 남궁혁 박사 등과 함께 구약성서 개역에 힘썼다. 1931년 10월 당시 숭실 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교장 맥큔(G. S. McCune) 박사의 초청으로 ‘숭실학교 창설의 날’ 행사에 베어드 박사 내외는 창설자로서 특별 초대를 받았다. 그 후 베어드 박사는 장티푸스에 걸렸다. 2주간의 치료도 보람 없이 그는 1931년 11월 28일 별세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평양 숭실 학교 구내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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