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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사이드 선교사(Wiley Hamilton Forsythe1873-1918)
선한 사마리아 사람 포사이드
2010년 12월 20일 (월) 23:05:40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일명 선한 사마리아 사람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는 1873년 12월 25일 미국 켄터키 주 해로스 버그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1890~1894), 1898년 루이빌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 과정을 마친 후, 쿠바에서 벌어진 미국과 스페인 전쟁 때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포사이드는 1904년 8월 10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의료 선교사로 파송되어 입국했다.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순회 진료를 하며 고아원을 운영했다.

1905년 어느날 망골(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했던 말목 장터 근방 마을)에서 강도에게 습격 당한 부상자를 치료해 달라는 간청을 받고 마을에 찾아가 부상자를 치료해 주고 밤이 늦어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날 밤 포사이드는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다. 귀가 잘리고 두개골이 깨지고 얼굴과 목에 큰 상처를 입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진실한 사람들이 그를 조심스럽게 전주로 데려와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귀와 머리의 상처가 깊어서 순조롭게 아물지 않아 미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고 2년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포사이드는 목포에서 의료 선교를 하게 되었다.

 S.O.S. (광주) 오웬(Clement Carrington Owen) 선교사는 1867년 7월 19일 미국 버지니아 주 쿨러스터 스프링에서 태어났다. 1886년 햄튼 시드니 대학을 졸업하고, 1894년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오웬은 복음 전도자와 의사의 자격을 갖추고 1898년 입국하여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울 겨를도 없이 서둘러 목포로 내려가 유진 벨이 개설한 목포 선교부에 합류하여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고 의료 선교를 하며 교회에서는 성경 공부를 가르쳤다.

1900년 12월 12일 여의사 와이팅(Dr. Whiting)과 결혼했다. 그리고 1904년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광주로 왔다. 화순, 보성, 장흥, 순천 등 13개 군이 그의 선교 지역이었다. 1개월씩 순회 선교를 했다. 때로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430명에게 학습(교리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1909년 3월~4월 초에 광주 남쪽 250리 지역에서 순회 진료를 하던 중 과로로 인하여 쓰러졌다. 그때에 진실한 한국인 친구가 그를 가마에 태우고 광주로 향했다. 하지만 여행길에 먹지도 못하고, 차가운 북풍에 시달리며 산을 셋이나 넘는 고단한 여행을 해야 했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광주에 도착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차도가 있는 듯했으나 토요일에 갑자기 폐렴이 악화되었다. 닥터 윌슨이 오웬의 몸 상태를 보고 걱정이 되어서 목포에 있는 닥터 포사이드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보를 쳤다. 닥터 포사이드는 전보를 받고 4월 4일 광주로 향했다. 조랑말을 타고 오던 그는 광주 길목 40리 밖에서 길가에 쓰러져있는 한 여인을 발견한다. 포사이드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길에 버려진 그 여인을 살펴본다.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어 있었다.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걸친 누더기 옷은 피고름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병 환자였다.

닥터 포사이드는 위독한 동료 선교사의 병을 고치러 가는 바쁜 길이었지만 길가에 버려져 신음하고 있는 환자를 그냥 버려두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포사이드는 피고름을 흘리고 있는 그 여인을 감싸안아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리고 자신은 말고삐를 잡고 걸어서 광주로 들어왔다. 광주에 도착한 닥터 포사이드가 그의 조랑말에서 나병 환자 여인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아 내리는 것을 구경꾼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던 당시 광주에서 깡패로 악명이 높던 최흥종은 마음에 가책과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선교사들의 일을 적극 도왔고, 후일에 목사가 되어 나환자를 돕는 일과 사회사업을 하였다.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광주는 낯선 곳이었고, 잠깐 다녀가는 곳이었다. 포사이드는 동료 선교사 닥터 윌슨을 찾아가서 그 여인에 대한 치료와 거처를 부탁해 보았으나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그는 고심 끝에 광주 동남쪽에 위치한 옹기 가마터를 발견하고 그곳을 그 여인의 임시 거처로 정하고, 선교사들이 쓰던 침구와 옷가지를 얻어 챙겨주고 목포로 돌아왔다.

닥터 포사이드와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던 나병 환자 여인과의 우연한 만남은 한국에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이 세워지는 계기가 된다. 닥터 포사이드가 목포로 돌아가고 나서 파란눈 노랑머리 서양의사가 나병 환자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나병 환자들이 하나 둘씩 광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닥터 포사이드의 동료 선교사 닥터 윌슨을 비롯해 광주 지역 선교사들은 닥터 포사이드의 헌신적인 행동에 감명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고 병원 시설 준비를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뜻밖의 어려움에 부딪치는데 광주 주민들이 병원의 설립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나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광주 한복판에는 안 된다는 항의였다.

선교사들은 1912년에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나병 환자 수용소와 병원을 세웠다. 닥터 포사이드와 한 나병 환자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어서 4년만에 병원과 수용소가 준공된 것이다. 나라의 주권마저 위태롭던 그 시절 일제 강점기에 어느 누가 피고름을 끝도 없이 계속 흘리는 나병 환자들을 보살필 수 있었을까?

 포사이드 기념비에 닥터 포사이드는 괴한에게 귀를 잘리고 나서 풍토병에 감염되어 선교지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때문에 1912년 결국 미국으로 돌아갔다. 포사이드는 투병 중에도 7년이 넘게 미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을 계속했다. “그들이 질병에 노출되어 무방비 상태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빨리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들을 도와줍시다.” 그는 나병 환자를 돕기 위한 성금 모금과 한국으로 파송할 선교사를 모집하는 일등 많은 일을 했다.

닥터 포사이드는 귀가 잘리고 나서 그 후유증과 풍토병으로 1918년 5월 9일 45세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소천 소식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슬퍼했다. 당시 최흥종(초창기 윌슨의 어학 선생, 조수, 사회 사업가, 삼애 학원 설립, 호혜원 설립, 결핵 환자 요양소 송등원 설립)은 루터의 말을 인용해서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 그렇게 태어났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체는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포사이드의 헌신적인 봉사 정신을 칭송하였다.

 닥터 포사이드는 한국인들과 나병 환우들에게서 성인(聖人)으로 존경받고 있다. 포사이드는 나병 환우들의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이었고 그의 선행은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일이었다. 자신들의 생명이 은인에게 무엇으로 그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을까? 그들의 마음은 이심전심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정성어린 자발적인 성금으로 닥터 포사이드 선교사 기념비를 세웠다.

오고 오는 세대에 그 고마움과 잊을 수 없는 그의 아름다운 선행을 전하고 기리기 위함이었다. 닥터 포사이드의 최선을 다한 헌신적인 사랑에 대한 환우들의 감사의 표시는 눈물겹도록 감동적이었다. 1926년 나병원과 부속 시설이 여수군 율촌면 신풍리로 옮겨갈 때 포사이드 기념비도 옮겨갔다. 환우들은 광주에서 여수까지 사람을 태운 가마를 메듯 기념비를 메고 갔는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원하여 기념비를 메고 인적이 끊긴 밤길을 15일 동안에 걸어서 옮겨갔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광주에서 여수로 옮겨왔다는 사연 많은 기념비는 애양원에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애양원에서는 자체적으로 닥터 포사이드 기념비를 다시 세웠다. 애양원에서 세운 닥터 포사이드 기념비의 비문을 옮겨 쓰면 다음과 같다.

 정면: 「故 포사잍 醫師 紀念碑」

 후면: 「주후 一九二六年十一月十三日」

 측면: IN MEMORY OF W.H. FORSYTHE M.D. BY THE KWANG JU LEPER HOSPITAL 1926 다른 측면: 「光州癩病院建之」비문은 단조로웠다. 그의 생년월일도, 입국연월일도, 몰일(沒日)도, 그의 선행도, 그가 쌓은 공적도, 아픔의 흔적도 없었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에 누(累)가 될까 해서 하늘나라에서의 몫을 여백으로 처리함이었을까? 글자 없는 여백은 운치가 돋보이는 듯 했다. (필자는 2008년 10월 20일 전남 여수 율촌면 신풍리 애양원을 방문하여 포사이드 기념비문을 확인했다.)

일자(一字)로 길게 놓여진 비대(碑臺)위에 4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고 포사잍 의사 기념비, 그 옆에 윌슨 의사 기념비(1926년 11월 13일), 보이열 원장 기념비(1965년 9월 10일), 스탠리 원장 기념비(1982년 4월 7일)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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