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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로드 선교사 (Herbert Lord 1889-1971)
2011년 01월 17일 (월) 17:56:43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구세군은 1865년 영국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가 넘쳐나는 부랑자들을 구원하겠다며 거리 선교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부스는 보다 공격적인 선교를 하기 위해 군대 조직을 교단에 차용했다. 한국 구세군 역사는 로버트 호가도 정령이 1908년 10월 1일 인천 제물포로 입국하여 서울에서 구세군영문(교회)을 창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918년부터 사회봉사사업이 시작되어 고아들을 위한 육아원과 빈민 구제소를 운영하였다. 구세군 특유의 자선 냄비가 서울 거리에 등장한 것은 1928년 12월부터였다. 소명은 헐버트 로드(Herbert Arthur Lord)는 1889년 12월 18일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1909년 11월 8일에 사관 임명을 받고, 1910년 1월 15일에 한국에 입국했다. 입국한 다음날부터 한글 성경을 가지고 개인교수를 받았지만 제일 빠른 길은 사람들과 직접 만나서 배우는 것이었다. 로드는 함께 입국한 실베스터와 외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조그만 마을에 가서 정착하여 노방 전도, 가정 방문 등 한국 사람을 만나며 한국말을 익혔다.

서울 지방관으로 3년 동안 영문(교회)을 섬겼다. 헐버트 로드는 1913년 3월 14일 마가렛 뉴헴 양과 결혼했다. 1924년부터 5년 동안 구세군 사관학교 교장직에 있었고,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성경 번역과 사관 고급 교육을 실시했다. 1935년 그는 말레이시아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받고 출국하였다. 그는 싱가폴을 중심으로 도서 지방에 감화원, 초등학교, 유아원, 양로원 등 복지 사업과 사회 사업에 착수했다. 헐버트 로드는 1941년 영국 왕실에서 수여하는 훈장(O.B.E.)을 받았다. 1942년 2월 15일 싱가폴은 일본 침략군에 의하여 함락되고 헐버트 로드는 장지 캠프(Changi Camp)에서 연금 생활을 했다. 그가 감금되어 있던 수용소에는 1만 2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도 불굴의 정신으로 갇힌 자들을 위로하며 그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일본 침략군이 물러간 다음에는 복지 사업과 사회사업으로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나누어 주었다. 1946년 그가 영국으로 귀환했을 때에는 복지 활동의 공로로 영국 왕 조지 6세로부터 왕실 훈장(C.B.E.)을 받았다.

 죽으면 죽으리라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헐버트 로드는 구세군 한국 사령관으로 임명 받고 1947년 4월 27일 재입국했다. 전쟁이 끝난 한국에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구실로 북위 38도선을 그어놓고 소련군은 북쪽에 미군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주둔해 있었다. 소련은 38선을 강화시켜 전초기지를 만들고 북한군을 앞세워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하여 한국 전쟁이 터졌다. 헐버트 로드 부부가 머물고 있던 서울은 38선에서 불과 50마일 거리에 있었다. 서울 시민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사태가 많이 악화되었다. 헐버트 로드는 세상에 의지할 데 없고 갈 곳이 없는 고아들과 생활하고 있었다. 서울을 떠나고, 한국을 떠나려면 그 아이들을 버리고 가야했다. 헐버트 로드는 싱가폴에서 일본군이 진군해 올 때 교회를 지키고 있다가 3년 반의 옥살이를 했던 것 같이 한국(서울)에서도 교회를 지키고 있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비장한 결심을 했다고 한다. 영국 공사 홀트(Vyvian Holt)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참장(Commissioner)께서 이곳(서울)에 머무시기로 결심한 것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부인께서는 (다른 선교사 부인들 포함) 내일 아침까지는 철수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사의 명령이었다.

 헐버트 로드의 부인 마가렛은 남편과 함께 있고 싶었으나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 서울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로드는 영국 대사관을 찾아갔다. 대사관측에서는 불가피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로드가 정확한 한국어로 통역할 수 있을 것을 생각하여서인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북한 공산군이 대사관 문 앞에 들이닥치며 대사관 직원 명단을 내놓으라고 으르렁댔다. 그리고나서 그 다음 주일 오후 대사관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기관총으로 무장한 지프차 한 대가 안으로 들어왔다. 영국 공사와 로드를 지프차 뒤를 따라온 차에 타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내무서로 가서 밤 12시가 넘도록 심문을 계속했다. 소공동 삼화 빌딩과 무학여자 고등학교에 감금되어 있던 미군 포로와 선교사들은 미아리 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 대열 속에는 구세군 사령관 로드와 감리교 선교사 젠슨(A. K. Jensen), 성공회 알버트 리(A.W. Lee), 찰스 헌트(C. Hunt) , 쿠퍼(A.C. Cooper), 성공회 수녀 마리아 클라라(Mary Clare Whitty) 등이 있었다. 이들 대열이 의정부 동두천을 거쳐 연천에 이르는 동안 아사자와 병사자가 속출했다. 로드와 젠슨이 쿠퍼 감독의 뒤를 따랐고 대열의 후미에는 67세의 마리아 클라라가 헌트의 부축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수안을 거쳐 9월 초 평양 어느 작은 학교에 수용되었다. 여기서 이들은 외교관, 미국인, 유럽인 등으로 구분되었다. 언론인 필립 딘(Philip Deane, The observer)이 마지막으로 끌려와 외부의 형편과 전쟁 소식을 전해 주었다. 9월 8일 건방진 녀석이란 별명을 가진 뚱뚱보 장교가 로드를 불러냈다. “모두들 이동할 준비를 하라”는 명을 내렸다. 밖에는 트럭이 대기중이었다. 기차 정거장에 도착하자 은폐중이던 기차에 모두들 실렸다. 선교사 일행은 전투에서 포로가 된 미군 병사들과 합쳐졌다. 천주교 신부 크로스비(Philip Crosbie)는 그때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추운 날 맨발로 머리엔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채 얇은 여름 군복을 입은 채로 무겁게 발을 내딛는 그 젊은이들의 모습은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 우리는 그들이 모두 앞차칸에 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차 안에 좌석이란 모두 뜯겨졌고 들창도 유리 대신 합판으로 때려박아 여기 저기 구멍이 나 있었다. 들어서니 담요를 내주고 음식도 약간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모두들 초조히 기다렸다.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드디어 기관차가 연결이 된 모양이었다. 몇 마일 가다가 문득 서더니 기관차는 다른 데 필요해서 가버렸으니 포로들은 그대로 잠잘 준비를 하라고했다.

 콩나물처럼 실어놓은 상태에서 다리 뻗고 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드는 목숨을 걸어놓고 재고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총을 들이대고 잠잠하라고 했으나 로드가 계속 우겨대자 한 장교가 잘 해보겠다고 약속을 했으나 아무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포로들은 기차를 버리고 공습을 피했다. 매일같이 이 모양이었다. 밤에는 기차에서 음식도 제대로 못 얻어 먹고 뜬 눈으로 새우다시피하고 낮이면 기차에서 나와 공습을 피해야했다. 압록강변 국경 지대 만포에까지 오는 동안 대우는 점점 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하루의 양식이란 14온스의 마른 좁쌀과 제한된 몇 모금의 물뿐이었다. 여기서 전쟁 포로와 민간인들은 분리되어 옛날 만주에서 넘어온 이민자들을 위한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 어느날 헐버트 로드는 맥아더 장군이 삼팔선을 넘어 북진 중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주일 후에 평양이 함락되기는 했으나 피로에 지쳐 있는 헐버트 로드에게 가장 가까이 이른 것은 이십 마일 밖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접근했으나 다른 쪽에서는 중공군이 부지기수로 투입 중이었다. 포로에게 미친 직접적인 영향은 “빨리, 빨리”를 외치는 감시병들의 고함소리와 계속되는 강행군뿐이었다. 죽음의 행진으로 압록강 국경선을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조그마한 농가에 잠시 수용되었다.

 대부분의 인원은 집 밖에서 노숙을 해야 했고 집안에 들어간 사람들도 지붕 덮개가 벗겨져서 하늘이 보이는 농가의 벽을 의지하고 웅크리고 앉아서 밤이 새도록 떨어야 했다. 전직 형무소 관리로 있던 소령이 감독관으로 바뀌어오자 사정은 더 악화되었다. 그는 승마용 바지에 몸이 꽉 끼는 잠바를 걸치고 빈틈없는 감시를 하며 괴롭혔다. 그는 큰 키에 걸을 때는 머리를 조금 앞으로 숙이고 빨리 걸었다. 또록또록한 눈은 바쁘게 움직였으며 그의 이는 소리를 지를 때면 눈에 띄게 튀어 나왔다. 그의 별명을 ‘호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두고두고 호랑이라는 이름으로 기억이 될 존재였다. 1950년 10월 31일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한다면서 모든 사람들을 불러내고서는 법석을 떨었다. 무시무시한 한국의 겨울이 이미 닥쳐왔고 시베리아에서 몰아치는 찬바람은 강에 살얼음을 덮고 첫눈을 몰아왔다. 일행은 가혹한 겨울을 어떻게 견디어 낼지 막막할 뿐이었다. 호랑이는 로드에게 민간인 그룹의 대표자를 뽑으라고 했다. 로드가 한국어를 잘 하기 때문에 그가 뽑혔다. 그러자 호랑이 감독관은 “안돼, 로드는 할 일이 따로 있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킨난(Quinlan) 주교가 민간인 대표로 뽑혔다.

 호랑이는 로드를 가리키면서 “넌 이 모든 부대의 총책임을 지는 거야, 알았지?” “실례입니다만 나는 영국 사람이고 또 민간인입니다. 그러니 내가 미군 부대의 책임을 진다는 것은 적합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로드 부장은 대답했다. 호랑이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미군 장교 던 소령(Major Dunn)이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크게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하지만 로드가 명령을 하달하는 책임을 맡도록 되었다. “오늘 밤에 이동할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로드는 “어디로 갑니까?”라로 물었다. 압록강 동북방에 있는 수백 마일 떨어진 어느 지점이란 말을 듣고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들 걸어가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로드는 강경하게 항의를 했다. “우리는 걸을 수 없습니다.” 로드는 단호히 선언했다. “왜 걸을 수 없나?” 호랑이가 다그쳐 물었다. “걸을 형편이 못됩니다. 아홉 달 된 어린애나 병들어 꼼짝 못하는 82세의 신부는 걸을 수 없습니다. 봉사인 벨지움 수녀도 있으며 또 폐병으로 죽어가는 이도 있습니다. 미군 병사들은 발을 옮겨 놓기도 힘든 지경이랍니다. 이제껏 계속 걸어 오지 않았습니까?” 로드는 진지하게 말했다. 호랑이는 그의 손가락을 헐버트 로드의 가슴에다 들이대며 “너 죽을래?”라고 소리쳤다. 로드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그러자 호랑이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걸어봐!” 이렇게 해서 만포에서 중강진에 이르는 ‘죽음의 행진’이 강요되었고 이 기간 중 많은 민간인과 군인(포로)들이 죽었다. 만포에서 자성으로 가는 설원(雪原)의 행진은 이른 아침부터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힘겹게 행진(행군)하다가 날이 저물어 행군 정지 명령이 떨어지면 행렬은 눈덮힌 언덕을 의지해서 들판에 멈춰섰다. 호송 군관(장교)이 지친 목소리로 외쳤다. “자! 오늘은 여기서 쉬어간다.” 민간인들은 눈덮힌 밭고랑 한쪽에 미군(포로)들은 저편 밭고랑에 자리를 잡고 살을 에이는 듯한 북녘의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 밭고랑에 수북이 쌓인 눈을 쓸고 웅크리고 앉아서 긴 겨울밤을 떨며 지새워야했다. 이들이 입고 있는 여름옷은 찬바람을 막아주지 못했다. 헐버트 로드 등 성직자들은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시시각각으로 엄습해오는 죽음을 대비하며 최후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날마다 계속하여 압록강을 따라 깊이 올라갈수록 절망에 빠지는 이들이 많았다. 죽음의 행진은 이미 산을 넘고 내를 건너며 골짜기를 지나왔다. 이제 시골 풍경은 보이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으며 단지 끈기와 힘만이 필요했을 따름이다. 연약한 사람들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강행군의 대열에서 뒤처져 낙오자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점호를 해보니 미군 병사 열 명이 간밤에 동사하였다. 호랑이는 화가 나서 즉시 매장을 하고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전 부대원에게 말하기를 “행군에 발맞추기가 힘든 사람이 있다고 하니 오늘 따라 오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은 따로 나서라. 병원에 보내어 치료한 뒤 나중에 만나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로드는 직감으로 무엇이 잘못되는 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통역을 하면서 아무도 이 말에 응하지 말라고 경고를 덧붙였다. 그래도 군인 여덟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중 한 명은 이렇게 지껄였다. “한번 해보는 거야. 아무래도 걸을 수 없으니 남에게 폐만 끼치게 되지. 우리는 병원으로 가는 거야.” 대열이 이동하자 로드는 호랑이가 무덤 열여덟 개를 파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대열 뒤 자기 자리에서 따라가던 로드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 로드는 열여덟 명의 사망 확인서에 서명을 했다. 죽음의 행진을 중강진에서 어느 험한 산길을 올라가고 있을 때 67세의 성공회 수녀 마리아 클라라가 대열에서 낙오되어 털썩 주저앉았다. 호송 군관과 호랑이가 총을 들이대도 어쩔 수 없었다. 호랑이는 로드를 보자 “저 여자를 걷도록 해”라고 소리쳤다. 클라라는 초점을 잃은 시선으로 다가서는 로드를 바라보았다. 호랑이는 로드더러 업고 가라고 했다. 로드는 등에 업으려고 애를 썼으나 로드 자신도 61세의 노구였으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되겠소” 호송 군관은 헐버트 로드의 등을 떠밀었다. 잠시 후 ‘탕’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로드가 뒤를 돌아보니 호송 군관의 총구가 아직도 클라라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고 클라라가 두 손을 크게 모아 쥐는 모습이 보였다. ‘탕’ 또 한 방의 총성이 울리면서 클라라는 머리를 떨구었다. 1950년 11월 6일 중강진 험한 산길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쓰러져 꽁꽁 얼어붙은 북녘 땅에 붉은 피를 흘린 마리아 클라라의 최후 모습이다.

 마리아 클라라(Mary Clare 1883~1950.11.6)는 1883년 아일랜드에서 출생, 1913년 성 베드로 수녀회에 입회하여 1915년 성 요한 세자의 날에 수녀로 서약하였다. 1923년 3월 25일 입국, 1925년 9월 성가 수녀원 창설, 1934년 5월 16일 초대 원장이 되었다. 마리아 클라라는 미술과 음악, 언어학에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출국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 재입국하여 수녀원에서 사역 중 7월 31일 체포당했다. 헌트(Charles Hunt)는 1889년 더햄(Durham) 대학을 마친 후 아놀드와 함께 캠브리지 성 어거스틴 대학을 다녔다. 연극, 문학 등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 춘원 이광수 등과도 교제를 가졌고, 셰익스피어를 공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헌트는 11월 20일 평안북도 압록강변 해창리에서 별세했다. 쿠퍼(A. C. Cooper)는 마지막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헌트와 마리아 클라라는 나와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무서운 100마일 행군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행군을 하면서 죄의 고백 기도를 했고, 죄를 사하는 기도를 했다. 그것은 우리들이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면서 가진 귀한 예식이었다”고 기록했다.

 시련은 어느 날 우락부락한 감시원이 로드의 얼굴에다 책을 내던지며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다른 손에 권총을 들고 있었다. 시비조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지요”로드는 태연히 말했다. “그래, 공부께나 한 사람이 아직도 신이 있다는 낡아빠진 생각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감시원은 이렇게 비웃었다. “예, 물론이죠”라고 로드는 말했다. 감시원은 한 발자욱 물러서며 “그럼, 좋아. 한번 증명해 보지. 내가 등 뒤에 서 있을 테니 하나님께 기도해서 내가 어느 손에 이 총을 쥐고 있는지를 맞추어보 게.” “나는 그런 기도는 드릴 수 없어요. 하나님은 요술쟁이가 아니니까 그런 식으로 조롱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는가?” “그래요. 사실 나는 지금 기도하고 있어요.” “기도를 해? 무엇 때문에?” 감시원은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신이 성을 내지 않게 은혜를 주시고, 그리고 만일 당신이 나에게 총을 쏜다면 기독교인 답게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 잠시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드디어 감시원은 총든 손을 내리고 천천히 걸어가 버렸다. 로드는 숨을 길게 내쉬며 죽음의 그림자를 털어 버리듯 이마를 쓰다듬은 다음에 안으로 들어갔다.

 북한 감시병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기도는 단지 시간 낭비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들이 지금 손에 매를 들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 저들이 옳고 내가 잘못되었을까? 거룩하고 선량한 남녀들이 극히 사소한 것들을 위해 기도했으나 죽어가지 않았는가? 이 무신론자들이 우리보다 진리를 더 잘 알고 있을까? 그들은 현명하고 우리는 어리석은가?’ 이때 환한 빛이나 밝은 별 또는 천사들의 합창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익히 알고있는 독백이 그의 입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고 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는도다.” 시편 23편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친숙한 시편으로 신앙생활의 진수가 간직된 시편중의 시편이라고 한다.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헐버트 로드와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시니 강하고 담대하라는 신령한 영적 체험을 한 것이다. 로드는 새 힘을 얻고 확신이 생겼다.

다음날 아침 일과(日課)가 시작되기 전 미군 포로들은 막사에 주저 앉아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고역스런 행군 명령을 기다리며 이제는 죽어도 더 이상은 행군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며 시름에 잠겨 있을 때 헐버트 로드가 불쑥 들어섰다. 병사들은 그를 쳐다보며 ‘저 영감이 웬일이야?’라고 생각했다. 로드는 병사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면서 “젊은이들! 좋은 소식이 있어 들어보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편 23편을 암송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는도다.주께서 원수들 앞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날 헐버트 로드가 암송한 시편 23편은 마치 천사가 전해 주는 메시지 같았다고 한다.잠시 후에 감시원들이 들어왔다. 이제 행군을 시작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모두들 새 힘이 솟아났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도 모르게 병사들은 훗날 그 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메시지 같았어요. 평생 그처럼 감동한 적은 없었지요. 그러자 감시원들이 왔어요. 가지 않으면 죽는 거예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지요. 모두들 끝까지 잘 견디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그날 아침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거예요.” 저들을 용서하소서! 12월 어느 날 아침 감시병이 헐버트 로드를 불러냈다. 그는 조그만 독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침침한 방이었다. 독방에 있으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는 헐버트 로드의 얼굴에 총을 들이대며 무릎을 꿇으라고 소리쳤다. “무릎을 꿇어!” “이제 자백하겠나?” 그는 소리쳤다. “무엇을 자백하란 말이요?” “양심에 비추어봐. 무엇을 자백해야 할 것을 알 테니까. 그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는 씩씩거렸다. 그를 달래기 위해서 헐버트 로드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자백할 게 없어요. 제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말해주면 그렇게 하도록 해보겠어요.” 그랬더니 더 화가 난 모양인지 방아쇠를 잡아 당기는 것이었다.“다시 돌아올테 니 그 동안 생각해 봐, 자백을 하지 않으면 죽일 테니까 각오해. 알겠지?” 지독히 추운 방이었다. 몸을 따뜻하게 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밖에서는 감시원들이 24시간 지켜섰다. 호랑이를 두 번째 만났을 때도 전번 못지 않게 괴로운 것이었고 아무 결과도 없었다. 로드는 신경이 곤두선 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식사는 하루 한 끼뿐이고 그나마 소금도 넣지 않고 끓인 좁쌀죽이었다.

 킨란(Monsignor Quinlan) 주교가 음식을 날라다 주었으나 말은 못하게했다. 어느날 킨란이 죽을 가져왔을 때 늘 하는 말로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 기운이 다 빠지고 쓰러질 것 같아요.”라고 말했더니 킨란은 익살스럽게 이런 말을 했다. “여보게 젊은이 나보다 7살 아래니까 더 참아야지, 괜찮을 거요.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정신을 좀 차려요. 십자가로 가는 길을 알고 있지요? 침착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되새겨 봐요. 그러면 기운이 날 테니까요.” 이런 말을 남기고 그는 가버렸다. 로드는 침침한 독방에 홀로 남았다. 십자가로 가는 길! 복음서의 여러 구절들을 생각해 보았다. 수난 주간의 일을… 겟세마네의 기도, 배신과 결박, 희롱을 받으심, 공회의 심문, 빌라도의 법정, 헤롯 앞에서 빌라도의 판결, 골고다까지 갈보리 산 위에 세워진 십자가 구속의 사건이 눈으로 보듯이 떠올랐다. 피투성이가 된 옷을 입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압력 때문에 땅에 넘어질 듯한 모습, 예루살렘 여인들을 만나신 일 베로니카(Veronica)가 예수님의 얼굴을 씻기는 모습 등을 보았다. 밤새껏 되풀이 생각해 보니 드디어 세상의 구세주가 십자가 위에 달리시어 미움, 잔인 등을 극복하시며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말씀하신 그 모습이 다시금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예수님의 그 부르짖음이 캄캄하고 추운 밤 자신을 미치도록 만드는 분노와 절망에서 헤어나도록 일깨워 주는 듯했다. 저들을 용서하라고? 죽음의 행진을 하는 도중 목격한 너무나도 많은 무자비한 행위들이 내 맘 속에 용솟음치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로막는 듯했다. 몸은 얼었으나 땀을 흘리면서까지 고민을 했다. 드디어 캄캄한 방에 별이 비추인 것도 아니고 또 천사들의 합창이 활홀경으로 이끌고 간 것도 아닌데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능력이 어두운 영혼 속에 밀물 쳐 들어왔다. 헐버트 로드는 “오, 아버지 하나님, 나도 저들을 용서하오니, 나를 용서하시옵소서.”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종이 울리고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다시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로드는 4일 동안의 독방 생활을 잘 견디어냈다. 호랑이는 소득이 없는 일에 지쳐 버렸는지 로드는 다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로드가 포로가 된 후 북녘에서 첫번째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곳은 항상 눈보라가 몰아치고 압록강 물이 꽁꽁 얼어버린 강변 어느 곳이었다.

 눈이 하얗게 덮인 들판을 본 탓인지, 아니면 성탄 생각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누군가 '한밤에 양을 치는 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한둘 합세하여 차츰 노래 소리가 커졌다. 그때 감시원이 뛰어들며 “닥쳐, 당신들 성탄을 지키려는 거지 성탄이고 그리스도고 다 없단 말야. 단지 신화에 불과한 거야. 당장 그치지 않으면 쏘아버릴 테야”라고 으르렁거리는 것이었다. 그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것으로 그친 것이다. 밀가루 죽으로 저녁을 때운 뒤 서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고 나서 취침 준비를 했다. 로드가 채 잠들기 전에 간수장이 와서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당신들 성탄을 축하하려고 했지?” 그는 이렇게 물었다. "그렇소”라고 대답하니 "당신은 아직 성탄을 믿어?"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그러믄요.”이같이 분명하게 대답하니까 바보 같은 소릴 한다면서 돌아섰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그 간수장은 성탄송을 한국어로 써서 검사를 받으면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 30분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일을 준비했다. 찬송가가 없는 처지라 알맞은 노래들을 적어내기 위해서 모두들 기억을 더듬으며 서로 협력해서 30분짜리 순서를 준비했다. 간수장은 제출된 종이 쪽지들을 들여다 본 다음 이튿날 저녁 식사 후 직접 와서 감시를 하겠다고했다.

 포로들은 그 동안 필요한 때 쓰기 위해 때에 따라 조금씩 모아두었던 기름으로 등을 켤 수 있을 만큼 준비해 두었다. 깨어진 질그릇에 담긴 기름은 헌 실로 꼬아 만든 심지에 불을 밝혔다. 1950년 크리스마스는 아주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되어 등에 불을 켠 것이다. 그을음이 가라앉고 불이 채 밝기도 전에 간수장이 나타났다. 전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모자를 벗고 그는 일행 중에 끼어 앉았다. 그의 시계 분침이 열두점을 가리키자 이렇게 외쳤다. "자! 크리스마스다. 30분간 시작” 일행은 기독교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한 밤에 양을 치는 자', '그 어리신 예수', '고요한 밤', '참 반가운 신도여'등등을 불러 나가는데 간수장의 시계 바늘이 여섯 점을 가리켰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손을 흔들며 “그만, 30분이 지났고, 이젠 크리스마스가 끝났어"라고 말했다. 수녀들이 어려서부터 불러온 성탄송 '하나님께 영광'을 라틴어로 부르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안돼, 당신들은 이미 성탄을 지켰어.” 로드 부장도 청을 했으나 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거칠게 말했다. “안돼, 당신들은 이미 성탄을 지켰어. 어쨌든 그건 신화에 불과한 것이고 30분을 허락해 준 것이 내가 바로 노릇한 거야 더 이상 떠들지들 말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불이 꺼지고 다시 깜깜해 지자 일행은 그래도 성탄을 지켰다는것, 짧으나마 30분간 그리스도 탄 일에 기독교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다는 것을 흐뭇하게들 생각했다. 일행은 움막집 같은 데서 거하고 있었다. 볏짚으로 덮인 지붕엔 추위를 피해온 쥐들이 들끓었고 방은 자그마해서 발을 쭉 뻗고 잘 수도 없었다. 입은 것과 신은 것이 변변히 않아 모두들 추위에 혹독한 고생을 했다. 시간이 지나자 감시가 좀 뜸해진 것 같았다. 민간인들은 방에서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엔 특별히 먹을 것은 없었지만 자유를 최대한 누리기로 했다. 모두들 의논 끝에 디킨즈의 『크리스마스 캐롤』을 낭독하기로 했다. 여러 사람들은 기억을 더듬어 그 이야기를 새로 구성한 뒤 로드가 낭독하기로 추천을 받았다. 연령, 민족, 종교의 차별 없이 모두들 즐겁게 귀를 기울여 이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얼마 지난 뒤 움막집 막사 문이 열리더니 감시원이 들어서며 모자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 내리면서 로드와 쿠퍼 감독을 즉시 수용소 소장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언덕을 내려와 골짜기 건너 저편 언덕 위에 있는 사무실로 조용히 걸어갔다. 두 사람의 감시원이 이들을 호위했다.쿠퍼와 로드는 무슨 일일까 하고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좋은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고향에서 무슨 소식? 아니면 크리스마스 특별 배식? 또는 당국자들이 무슨 일을 꾸몄을까? 사무실은 언덕 한쪽을 파낸 움막 같은 것이었으나 훈훈하고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으며 벽엔 공산당의 여러 가지 표어들이 붙어 있었다.방 양쪽에는 조그만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쿠퍼 감독과 로드는 각기 자리에 앉으란 말을 들었다.북한 고위 군장교 두 사람이 들어와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름, 연령, 국적, 학력 등 여러번 답변한 것을 또 묻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좀더 개인적인 질문으로 이 대통령을 아느냐, 몇 번이나 만났으며 그와 무슨 얘기를 했느냐 등을 물었다. 아마 이 대통령 경무대 관저의 방명록을 보고서 묻는 것 같았다.거의 여덟 시간 동안 서로 입씨름만 했다. 심문자들은 혹시나 포로들이 말의 실수를 하지 않나 기다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곰곰이 생각하여 조리있는 답변만 했다. 인물, 지역, 정치적인 문제에까지 광범위하게 겹쳐진 것이었다. 쿠퍼와 로드는 춥고 배고픈 중에서도 언어의 기습을 죽을 힘을 다해 저지하고 있었다.

 두 장교가 일어선 것은 크리스마스 날 밤 10시였다. 두 사람을 남겨 둔채 장교들은 그냥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저들이 무엇을 먹으러 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배고픈 두 포로에게는 더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라디오 소리를 들었다.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자세히 들으니까 일본말 같았고 지금 뉴스를 읽는 듯했다. 아마 동경 방송에 틀림이 없는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그치더니 소녀의 노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이들이 잘 아는 크리스마스 노래였다. 감독은 로드를 돌아다 보았다. 두 사람은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짤깍 스위치가 꺼지고 노래가 그쳤다.그 즉시 심문자들이 들어오더니 가도 좋다는 것이다. 다시 두 명의 감시원 호위를 받으며 막사로 되돌아왔다. 어두움 속에 언덕을 내려오는 길이라 몹시 험했고, 또 춥고 배도 고팠으나 그래도 1,500마일 떨어진 비기독교 국가에서 지친 두 사도에게 보내진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들은 것을 생각했을 때 가슴이 흐뭇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 노래의 가사를 생각할 때 어두움이 빛으로, 절망이 기쁨으로 변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도 계신다.’는 놀라운 사실이 그들 마음 속에 새로이 떠올랐다.

 순박한 목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동방의 별을 보고 천사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여겼다. 귀환은 로드 일행이 ‘캐롤’을 부른 때는 포로 생활 중 최악의 시기였다. 군인과 민간인 포로들을 구별해 놓을 때까지는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않았다. 종래 민간인 37명은 따로 어느 농가에 잘 수용되었고 감시 책임자도 호랑이 대신 더 인간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쿠퍼와 로드는 좀더 여유있는 환경에서 주어진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 언덕을 오르내렸다. 덤불 숲 속이나 낙엽송 밑에서 같이 글도 읽고 묵상하며 기도도 드릴 수 있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얼마 지난 뒤에는 주일 아침 예배를 드렸다. 공중 기도와 설교는 아직 금지되었으나 감독과 부장이 번갈아 가며 성경을 읽었다. 여러모로 제약을 받아도 참으로 경건된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다. 어떤 때는 미군들과 함께 모일 때도 있었다. 찬송가는 모두 네 권뿐인데 성탄송 10편을 포함한 60편. 모두 기억을 더듬어 손으로 쓴 것이다.한번은 함께 찬송을 부르는데, 음악 가수였던 미군 맬라드 중위가 풍부한 바리톤 성량으로 몇 편의 찬송을 불렀다.

 그는 종종 탈선을 하면서까지 감독과 부장과 가까이 어울리며 자신의 영적인 문제들을 의논하기도 하였다.공식적으로 병사들과 민간인은 서로 어울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중위는 쿠퍼와 로드가 있는 옆방에 수용되어 있었고 게다가 벽에는 조그만 구멍도 있었다. 캄캄해진 다음에 이 병사는 두 성직자와 더불어 속삭일 수가 있었다. 드디어 맬라드는 자신이 세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세례를 받을 수 있겠냐고 청했다. 문제거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쿠퍼와 로드는 야근 보초들의 동정을 살폈다. 감시원들의 순시는 일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직자 두 사람은 계획을 짤 수가 있었다. 부장이 밖에서 망을 보는 동안 맬라드는 자기 방에서 살짝 빠져나와 감독의 방으로 들어가면 그는 기다렸다가 식을 드리는 것이었다. 물론 이상적인 환경이나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처지였으나 감독은 최선을 다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깊은 밤중에 밖에서 망을 보는 동안 맬라드는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다른 포로들도 이같이 비밀리에 움직이는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어느 한 사람도 간섭을 하거나 항의를 한 이는 없었다. 그때뿐만 아니라 후일에도 없었다. 그는 곧 그의 행동과 간증을 통해 영적인 체험의 충분한 증거를 드러내었다.

 그가 ‘그 험한 십자가’의 찬송을 부를 때마다 그 효과는 충격적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훌륭한 찬송을 듣는 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다. 포로에게는 고달픈 일이었지만 수용소를 여러 곳 옮겨봤자 생활은 그냥 그대로였다. 한번은 포로들이 다시 만포로 되돌아왔을 때 모두 형무소로 들어가란 말을 들었다. 포로들이 사용하려는 건물이 군 당국에 의해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형무소에서 철수하여 언덕바지 위에 있는 한국 집에 들어가게 되니 바람막이도 좋았고 온돌도 따뜻했다. 행정면에도 변화가 왔다. 중공 대표는 퍽 인도적이었다. 놀랍게도 식량보급이 증가되었고 쌀, 밀가루, 계란, 심지어는 고기까지 메뉴에 들어 있었다. 포로들에게 비누와 수건이 지급되었고 설날에는 과실과 사탕까지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중국 의사가 치료까지도 담당했다. 1953년 3월, 부장과 쿠퍼 감독은 그들의 이름과 몇 가지 점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질문의 방식은 괴이했지만 드디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가능하리란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다. 한국 전쟁 휴전 회담이 진행되면서 영국 정부가 소련 정부에 교섭하여 이들 민간인들에 대한 포로 취급이 해제되고 7인의 영국인들은 1953년 4월 9일 안동으로 이송되어 묵덴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오트포(Otpor)에서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다음날 비행장으로 가서 대기중인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는 승무원, 의사, 간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베를린을 경유하여 영국 에빙돈 공군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애빙돈 공군 비행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구세군 참모 총장이 ‘만복의 근원 하나님’ 찬송을 부르자고 했다. 헐버트 로드는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우리가 귀환한 것은 기도의 덕분이며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로드는 1957년부터 1959년까지 남아프리카 연방 순회 사령관으로 사역하다가 은퇴하여 1971년 4월 13일 영국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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