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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린튼 선교사(William Alderman Linton1891-1960)
휴 린튼 (Hugh Macintyre Linton1926-1984)
2011년 02월 15일 (화) 06:06:19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1891-1960)은 1891년 2월 8일 미국 조지아 주 토마스 빌에서 아버지 텔 린튼과 어머니 폰더 앨더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6월, 조지아 공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당시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제너럴 일렉트릭(GE) 회사 입사를 마다하고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 교육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윌리엄 린튼은 1912년 8월 23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항하여 9월 20일 목포항에 도착, 입국했다. 그의 첫 선교지는 목포였다. 곧 군산으로 가서 영명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17년 영명 학교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때에는 군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갔다. 린튼은 일본의 부당한 압제에 분노했고, 한국의 억울한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해에 미국 애틀란타에서 열린 남부 지역 평신도 대회에서 자신이 목격한 3.1 운동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일본은 10년 동안 조직적인 방법으로 5천 년 동안 존재해온 한국의 정체성과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려고 한다. 3.1 운동은 비폭력 항거 시위였다.…… 일본은 평화 행진하는 사람들을 기병대의 말발굽으로 짓밟았고, 총검으로 찔렀다.한국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비폭력 시위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세계를 향해 자유 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다.’또한 애틀란타 신문에 3.1 만세 운동에 대한 기사를 송고하면서 독립 국가를 염원하는 한국인들의 마음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주변 국가들의 도움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윌리엄 린튼은 주로 전주, 이리, 군산 등지에서 교육 선교를 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는 4, 5년에 한 번씩 주어지는 안식년 기간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교육학을 공부했다 (1919~1921). 1922년 유진 벨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입국한 그는 유진 벨 선교사의 딸인 샬롯 벨(Miss Charlotte Bell)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샬롯 벨은 아그네스 스콧 대학을 졸업했고, 당시 23살이었다. 윌리엄 린튼과 샬롯 벨의 결혼은 린튼가(家)의 사람들이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사 참배 강요를 받았다. 신사 참배가 가장 먼저 강요된 곳은 교육계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신사참배 강요의 시작은 1935년 평양의 기독교 학교에 정기적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할 때부터였다. 1935년 11월 평양 숭실 전문학교 교장 맥큔(G. S. McCune) 박사와 숭의여고 교장 수누크(V. L. Snook) 여사는 학교의 대표자로서 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신앙 양심을 내걸고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때 평안남도 지사는 60일간의 여유를 주면서 그 때 회답하라 했다. 만일 그때 참배를 거절하면 학교를 폐쇄하고 강제 추방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맥큔은 물러나와 평양 시내 27개의 교회 목사들과 이 문제를 놓고 협의했다. 협의 결과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전원이 신사 참배를 반대했다. 선교사들은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신사(神社)의 제식(祭式)에 있어서 종교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신사의 신들을 경배하고 있음이 확실하므로 신앙 양심상 도저히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한 숭실 학교 맥큔 교장의 회답서(1935년 12월)> 평안남도 지사는 맥큔과 스누크를 면직시키고 강제 출국시킨 다음 대대적인 신사 참배 강요에 나섰다. 당시 신흥학교 교장 윌리엄 린튼은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1937년 신흥 학교를 자진 폐쇄시켰다. 이때 호남지역에서는 전주 기전 여학교,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 여학교, 목포 영흥학교, 정명 여학교가 문을 닫았고, 순천 매산 학교, 매산 여학교, 군산 영명학교 등이 문을 닫았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은 선교사들에게 출국 명령을 내렸다. 1940년 10월 주경(駐京) 미국 영사 마쉬(G. Marsh)는 선교사의 철수를 명령했다. 윌리엄 린튼은 가족을 이끌고 1940년 11월 14일 출국했다.

대전 대학 설립하고 한국이 국권을 회복하고 난 후 1946년에 윌리엄 린튼은 다시 한국으로 와서 1946년 11월 신흥학교 교장직에 복직했다. 그는 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48년에 대학 설립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1950년 전쟁으로 설립이 지연되었다가, 1954년부터 2년 가까운 준비 기간을 거쳐 1956년 대전에 대전 대학을 설립하였고, 대전 대학은 후에 한남 대학교로 명칭이 바뀐다.

린튼은 1957년 벨 하우벤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윌리엄 린튼은 학교 부지를 물색하러 다닐 때부터 이미 자신이 전립선 암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학 개교 후 병이 깊어져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고 완치되기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남아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난 후에 병상에 누운 채 미국으로 건너가 1960년 그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학교 일에 매달리고 주일에는 시골 교회에 나가 봉사하였다고 한다. 그는 학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병상에 누운 채 미국으로 건너가 1960년 8월 13일 테네시 주 녹슨빌의 큰 아들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윌리엄 린튼은 21세에 입국하여 48년 동안에 500 교회를 세웠다. 인돈(Linton) 학술원은 선교사이며 한남대 교수로 재직한 Dr. John N. Somerville - 한국 명, 서의필 박사는 1994년 9월 한남대학교 설립자 인돈(W.A. Linton) 박사의 숭고한 뜻과 그의 생애를 기리고 한남대학의 창학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기관으로 인돈 학술원을 설립하고 서의필 선교사 본인이 사택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인돈 학술원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인돈 학술원에서는 <한남 인돈 문화상>을 제정하여 기독교 정신에 따라 선교, 교육, 사회 봉사에 공로를 세운 숨은 일꾼을 발굴 선정하여 그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그들의 생애를 연구, 집필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곳에선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없는 특화된 기독교 자료인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관련 선교 역사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인돈 학술원은 한남 대학교 캠퍼스 경상 대학 건물 뒤에 있다. 이곳 건물은 린튼 선교사의 설계로 지어졌는데, 건평은 약 68평이며 한옥의 전통 가옥처럼 ㄷ자 형으로 지붕에 기와를 입혔다. 건물의 전체적 구조를 보면 한옥과 양옥의 복합형으로 되어 있다.

 

휴 린튼 선교사(Hugh Macintyre Linton1926-1984)

 
   

휴 린튼 (Hugh Macintyre Linton1926-1984)은 1926년 장로교 목사 윌리엄 린튼과 어머니 샬렛 벨 린튼의 셋째 아들로 한국 군산에서 태어났다. 신사 참배 반대로 1940년 11월 14일 온가족이 강제 출국 당했을 때 휴 린튼은 14세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해군 장교로 입대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어스킨 대학을 졸업하고(1944~1947), 1950년 컬럼비아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에 프린스턴 신학교(1950~1953)를 졸업했다. 휴 린튼은 1954년 아내 로이스 린튼과 세 아들과 함께 입국했다. 그의 선교 지역은 전라남도였다. 휴 린튼은 순천으로 부임했다. 휴 린튼가(家)의 머릿 속에 아로새겨진 순천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순천 사람들은 순천(順天)이라는 지명(地名)처럼 하늘에 순종하면서 사는 착한 사람들이라고 선교지 순회를 순천을 중심으로 섬마을과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복음 선교를 하던 휴 린튼은 집을 나서면 2, 3일찍, 어떤 때는 열흘, 또는 3, 4주만에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휴 린튼은 섬 지방과 벽지를 돌아다니며 200곳이 넘는 교회를 세웠고, 도시보다는 농어촌과 간척지 개발 사역에 치중하였다. 전라남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라남북도 내륙 지방과 경상남도 해안 지역에도 가리지 않고 다녔다.

비포장 도로가 대부분인 시골길을 낡은 지프를 몰고 며칠씩 혹은 열흘이 넘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니다가 저녁 때 가족이 있는 집에 돌아와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이들은 아버지 돌아오셨다고 반기는데, 휴 린튼은 곧바로 응접실이나 안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는데 아내의 잔소리가 어김없이 명령조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대로 들어오지 말아요. 거기서 옷을 전부 벗어놓고 들어오세요!”라고 했고 그는 현관에서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직행하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기 때문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비포장 도로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옷과 진드기, 이, 벼룩, 빈대를 묻혀 들여 오는 것에 대한 예방책으로 아들 삼형제가 폐결핵을 앓고 난 후부터 어김없이 실시되는 엄격한 규칙이 었다. “아, 글쎄 이번에 갔던 그 집에는 말이야, 형제들이 참으로 많더라… 얘들아 형제 많은 집에 가서 잘 때는 방 중간쯤에서 자야 덜 물린다. 허, 허, 허…” ‘형제들’이란 다름 아닌 벼룩이나 빈대를 말하는 것이었고, 중간쯤에서 자라고 하는 말은 가능한한 벽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활 철학(?)을 말함이었다고 하니 그는 가히 도사(道士)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일까?

휴 린튼은 생활이 매우 검소하여 검정 고무신을 즐겨 신고 다녔다고 한다. 평소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섬마을을 순회할 때에는 길거리에서 고구마나 풀빵을 사서 여객선에서 먹기도 했다고 한다. 고무신이 다 닳아서 구멍이 뚫리면 타이어 수리하는 곳에서 땜질을 해 신기까지하여 그의 별명이 순천의 검정 고무신이었다고 한다. 교회 개척을 위해, 검정 고무신을 신고 남도 섬마을 농어촌을 다니면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고에 지친 모습을 보고, 휴 린튼은 1960년부터 1970년까지 10년에 걸쳐 광양 바닷물을 막아 대대적인 간척 사업을 하며 20만 평의 땅을 개간하여 땅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가정 교육은 휴 린튼 부부의 가정 교육은 매우 엄격하여 자녀들이 잘못하면 가차 없이 매를 들었다.

그는 군인 출신답게 정해 놓은 생활 규칙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아주 엄격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체벌은 주로 식사 시간을 이용하였고, 가족 식사 시간에 배식은 가장인 휴 린튼의 몫이었다. 잘못한 자식에게는 절대로 밥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그의 아내 로이스는 회초리로 자식들을 따끔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어머니로서의 자식 사랑은 바다보다 넓지만 때로는 바다의 폭풍같이 무서웠다고 한다.한두 대 때리고 그치는 엄포성 매질이 아니라 ‘내가 한번 더 잘못을 하면 다시는 이 세상을 못 볼 수 있겠구나! 그러니 두 번 다시 혼날 짓을 하지 말아야겠구나!’이런 결심이 들 때까지 매를 들었다고 한다.

소요리 문답 (암송) 휴 린튼 부부는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자녀들이 중학생이 되면 반드시 107문답으로 되어있는 소요리 문답을 외워야했다. 소요리 문답은 기독교 자녀들의 신앙 고백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기독교 사상과 교리에 대하여 간결 명확하게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고전 10:31, 롬 11:36, 계 4:11, 시 73:25, 26). 제2문: 하나님께서 무슨 규칙을 우리에게 주사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 할 것을 지시하셨습니까? 답: 신, 구약 성경에 기재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가 그를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할 것을 지시하는 유일한 규칙입니다(딤후 3:16, 계 20:18~19). 제3문: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입니다(요 20:30, 31, 미 6:8). 이런 식으로 된 107개의 질문과 답이다.

중학교 시절 개구쟁이였던 막내 아들은 이 때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 형제들은 이 107개의 소요리 문답을 달달 외워야했다. 암송하다 혹 틀리기라도 하면 그때만큼은 아버지가 매를 들었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낭비를 하지 말라거나 하는 잔소리는 하지 않으셨지만 소요리 문답에 대해서는 확고하셨다. 공부는 훗날 해도 되지만 삶의 가치관은 어렸을 때 세워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죽기보다 싫었다.

한창 반항심이 많은 청소년기에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소요리 문답을 외우자니, 그것도 107개씩이나!’ ‘또 틀리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정도로 맞기까지 했으니 아버지가 엄청 미웠고, 교회를 다녀야 하나라는 반감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매 덕분에 소요리 문답을 다 외웠고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게 터득한 신앙생활의 원칙들이 지금 나의 삶을 굳건히 이끌고 있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모두 아버지의 소중한 은혜이다’라고 했다. 1984년 4월 10일, 휴 린튼은 농촌 교회 건축용 자재를 트레일러에 싣고 순천 요양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지프 뒤에 건축 자재를 실은 트레일러를 달고 회전하는 차를 맞은 편에서 오던 관광 버스가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었다. 관광 버스 기사는 음주 운전 상태였다. 휴 린튼은 차에서 튕겨나와 논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택시에 실려 광주 기독 병원으로 가던 중에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 당시 순천에는 응급 환자용 앰뷸런스가 없었다. 그때 의대생이던 막내 아들은 훗날 한국의 응급 의료 체계를 혁신적으로 바꾸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결핵 퇴치에 앞장 선 로이스 린튼 로이스 린튼은 1927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태어났다.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어스킨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고 1948년 조지아 주 컬럼비아 신학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 무렵 해군 장교로 복무하던 휴 린튼과 결혼하고 1954년 남편과 함께 어린 세 아들의 손을 잡고 입국할 때 그녀의 나이 28세였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피폐한 지방에 지리산 곳곳에 남아 있던 빨치산들이 출몰하던 때였다. 그 시절 순천에서 선교사 가족의 생활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설사 그것이 사명자의 길이었을지라도… 그리고 모든 것이 핍절하고 궁핍한 시절이었다. 강한 의지의 성품을 지닌 로이스는 선교사의 아내로서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쉬는 날도 없이 늘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로이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기 위해서든 혹은 반대이든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의 남편 휴 린튼이 선교에 역점을 두었다면, 로이스는 의료 봉사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로이스의 의료 활동의 초점은 결핵 퇴치였다. 1962년 순천 지역에 큰물로 수해가 발생하여 많은 이재민이 생기고 결핵 환자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 때에 초등학교에 다니던 로이스의 아들 셋이 폐결핵에 걸렸다. 처음에는 휴 린튼 살림집 사랑방에 간이 진료소를 마련해서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로이스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결핵 환자들을 돌보느라 눈코 뜰새없이 바빴다.

비용도 모자라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로이스가 직접 여러 선교 단체에 모금을 다니기도 했다. 마침내 제대로 시설을 갖춘 결핵 진료소를 개설하였는데 이곳이 현재의 순천 기독 결핵 재활원이다. 1965년에는 입원 요양이 필요한 결핵 환자의 진료를 위해 ‘결핵 요양원’을 건립했다. 이어서 미국과 세계의 구호 위원 및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무의탁 결핵 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인 ‘보양원’을 세웠다.

이 요양원은 일반 병원 건물이 아니라 독립 가옥으로 처음에는 5개 병동이었으나 차차 늘려 1969년에는 20여 채가 되었다. 로이스는 한국인의 결핵 치료와 예방을 위해 평생을 헌신 봉사하였다. 이 공로로 1996년에 호암 상을 받았으며 이 때 받은 상금 오천만 원으로 막내아들인 존 린튼은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하여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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