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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슨 엥겔 선교사(Gelson Enge1868-1939)
2011년 02월 24일 (목) 06:24:49 한기총신문 webmaster@ccnkorea.com
   

엥겔(Gelson Engel)은 1868년 10월 10일, 남부 독일 워템베르그(Wurtemberg)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하였고 힘겨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나이 4살 때 아버지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엥겔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뉘르팅겐에 있는 뤼르 세미나(Lehrer Seminar)를 졸업(1883~1888)하였다.

그는 에빙겐(Ebingen)에서 열렸던 어떤 선교 모임에 참석한 후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1889년 8월 29일 선교사 교육 기관인 스위스 바젤(Basel)에 있는 ‘바젤선교교육원’(Basel Mission House)으로 가서 3년간 신학 교육과 선교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일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Edinburgh)에서 특별교사훈련의 기간을 보낸 후, 1892년 6월 6일 워템베르그(Wurtemberg)의 발링겐(Balingen)에서 바젤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곧 인도의 푸나(poona) 지방으로 파송되었다. 그는 인도에서 6년간 선교사로 봉사하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감리교 선교부로 이적하고 테일러 고등학교(Taylor High School For Boys) 교장직에 있었다.

엥겔은 푸나에서 1894년 12월 19일 호주 여성인 클라라 바스(Clara Bath) 양과 결혼하였다. 그는 30년 이상 인도에 체류하려고 작정하였으나 건강이 여의치 못하여 인도를 떠나야만 했고, 이때 그의 아내의 나라인 호주로 이민하기로 작정하고 1898년 호주로 갔다. 호주로 이주한 그는 빅토리아 주 스타웰(Stawell)에 있는 하버드 초, 중등학교(Harbard School) 교장으로 약 2년간 봉사한 후 빅토리아 주 장로교단(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에 정식 가입하였다.

그 때에 여전도회 연합회는 한국에 파송할 능력있는 목사 선교사를 찾고 있었는데, 이미 인도에서 6년간 선교한 경험이 있는 엥겔이 적절한 인물로 선정되었다. 엥겔은 1900년 9월 19일 아내와 세 아이, 곧 겔슨(Gelson), 허버트(Herbert), 도라(Dora)를 데리고 멜버른을 떠나 임지인 부산으로 향하는 긴 장도에 올랐다. 멜버른을 떠난 카수까 마루(Kasuga Maru)호는 시드니와 퀸즈랜드항을 거쳐 마닐라, 홍콩, 일본을 경유하여 고베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다른 증기선을 갈아타고 1900년 10월 29일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엥겔은 부산진에 있는 여선교사들이 기거하던 집에 살면서 한국 선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한국어 습득이었다.

11월 19일부터는 규칙적으로 한국어 공부를 위한 시간을 배정하였고, 한국인의 삶과 문화, 곧 생활과 풍습, 살림살이를 익혀 가기 시작하였다. 효과적인 한국어 습득을 위해서는 중국어(한문)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깨달은 그는 한국에 도착한 다음 해인 1901년 1월 25일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엥겔은 부산에서 18년 가까이 순회 전도자이자 개척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부산, 경남 지방에서 첫 한국인 목사가 배출된 것은 1909년이었으므로, 목사 선교사들의 지역 교회 순회와 치리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다. 1920년대까지도 목사 없는 교회가 절대다수였다. 목사 선교사들은 지역 교회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은 정기적 순회를 통해 성례를 베풀고, 교회 조직을 갖추게 하고, 제직을 임명하는 등 행정적 업무도 감당했다.

선교사들의 순회 여행에서 중요한 일은 개 교회의 적절한 말씀의 봉사자를 선택하여 ‘조사’로 혹은 영수(領首)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교육하고 격려하는 일이었다. 엥겔도 바로 이와 같은 일들로 바쁜 날들을 보냈다. 당시 아담슨 선교사는 경남 지방의 서부 지역을 담당하였고, 엥겔은 주로 동부 지역 곧 울산, 기장, 서창, 언양, 병영 등지를 순회하였다. 그 결과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엥겔 선교사와 직접적인 관계 하에 설립된 9개처의 교회라고 한다. 엥겔 선교사의 내한은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새로운 출발과 쇄신을 가져왔다.

그 동안 선교사들간의 불화와 대립은 조직과 제도의 약점을 보완하도록 자극을 주었고, 여전도회연합회와 청년 연합회가 각기 독립적인 선교사를 선정, 파송, 후원, 관리해왔으나 이제 장로교 총회 선교부는 보다 분명한 행정적인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엥겔 목사는 여전도회 연합회의 여선교사들을 통괄하며, 일신 여학교와 고아원, 부산 교회(현 부산진교회)를 치리하였고, 아담슨 선교사와는 선교사역지를 분담하여 지역을 순회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일상적인 과업이 되었다. 엥겔의 내한 이후 다시 북장로교 선교부와 선교지 분할에 관한 협의가 시작되었고, 1903년에 원칙적인 합의에 도달하였다.

1909년에는 다시 지역 조정에 합의하여, 초량을 북장로교회로 이관하는 대신 부산진, 동래를 고수하고 마산과 다수의 경남 지역을 확보하였다. 미국 북 장로교와의 선교부간의 지역분할협의는 그 후 여러 차례 계속되었는데, 1914년에 가서는 북장로교 선교부가 부산, 경남 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하기에 이르렀고 이 일을 주도한 이가 엥겔 목사였다. 신학교 교수 엥겔은 1902년부터 평양에서 시작된 신학교의 강사로 참여하였고, 1906년부터는 호주 선교부를 대표한 평양 신학교 교수단의 일원으로 매년 3개월씩 평양에 주재하면서 신학 교육에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부터는 호주 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여 평양신학교 전임 교수로 청빙을 받고 평양으로 이거하였다. 이 때부터 엥겔 목사는 오직 신학 교육에 전임하였다. 성경 언어에 탁월했던 그는 성경 언어 및 교회사 교수로, 그리고 도서 관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첫 선교사 교수였다. 엥겔은 평양 장로회 신학교의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파송 교수로 취임 20년 동안이나 봉직했다. 하루는 헬라어 시간에 엥겔 선교사가 들어와 싱글벙글 하면서 말했다. “내가 한국에 온 지 40년이 됐지요. 나는 한국에서 죽을려고 했는데 우리 미슌회가 나를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해요”하면서 좋아했다. 눈치가 둔하고 또 평상시 교수의 총애를 받지 못하던 박모 군이 말했다. “아니 교수님이 본국으로 돌아가시면 어학은 누가 가르칩니까?” 엥겔 목사는 마루를 꽝 구르면서 하나님이 가라는데…하였다고 한다.

평양 신학교에서 성서 원어를 주로 가르치던 엥겔은 독특한 성품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학문적 업적으로 여러 저서와 논문을 남기기도 했다. 부산에서 함께 일했던 첫 부인은 1906년 4월 2일 시드니에서 36세의 일기로 사망하였고, 1년 후인 1907년 7월 3일, 한국 선교사 아그네스 브라운(Agnes Brown, 1868~1954) 양과 재혼하였다. 브라운은 1868년 8월 11일 생으로 발라랏(Ballarat)에서 출생하였고, 1895년부터 한국 선교사로 일했다. 그러나 안식년으로 호주에 체류하던 중 엥겔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엥겔 선교사는 70세였던 1938년에 은퇴하여 멜버른으로 돌아갔고, 그 이듬해인 1939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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